제지사업에 진출하여 성장기반을 구축하다 (1966~1982)

1950년대 산업 불모지였던 이 땅에서 최화식 창업주는 ‘펄프 국산화와 국내 제지산업의 부흥을 통해 국가 발전에 기여한다’는 목표 아래 1966년 3월 대한팔프공업주식회사(이하 대한팔프)를 설립했다. 1967년 12월 현대식 설비를 갖춘 대단위 공장인 의정부공장을 준공한 대한팔프는 이듬해 1월부터 생 산에 들어가 제지산업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해 나갔다. 이후 대한팔프는 1975년 기업공개, 1976년 신양제지 인수 등 착실하게 기반을 다지며 우리나라 제지산업의 선진화와 부흥을 위한 발걸음을 이어 나갔다.

대한팔프공업주식회사 창립(1966. 3. 8)

1966년 3월 7일, 대한팔프가 출범했다.
1958년 한국제지의 전신인 한국특수제지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해 이 땅에 제지산업의 문을 연 최화식 창업주를 비롯해 최명진, 정진만, 김창윤 등 모두 9명이 창업에 참여했다.
대한팔프의 초기 자본금은 3,400만 원이었으며, 사업목적은 펄프 생산과 제지업 및 가공업, 판매 및 수출, 이에 관계되는 부대사업 및 관련 투자 등이었다.
초기 조직은 영업부, 업무부, 경리부, 총무부, 생산부의 5부체제였으며, 사무실은 서울시 중구 수표동 36-1에 위치했다.

대한팔프공업주식회사 첫 정관(1966. 2. 26 제정)

첫 생산공장, 의정부공장

대한팔프는 생산품목을 펄프에서 판지로 변경함에 따라 공장의 입지와 관련 설비의 교체가 불가피했다.
이에 매립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조치원 공장 부지를 매각하고 새 후보지를 찾아 나섰다.
먼저 서울 근교를 대상으로 물색한 후 경기권으로 넓혀 나갔고, 그 결과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53-1을 최종 부지로 낙점하고, 그 일대 약 5만 9,500㎡(1만 8,000평)의 부지를 매입했다.
의정부는 서울과 인접하고 교통이 편리하며 고지의 수집과 제지산업에 필수인 공업용수가 풍부해 제지공장의 입지조건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의정부공장 전경(1971. 11)

의정부공장 2호기 준공(1973. 11. 7)

대한팔프는 1971년 판지 제2호기 설치 계획을 수립했다.
1호기만으로는 생산성과 품질력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호기 설치 계획은 미국 닉슨 독트린과 워터게이트 사건의 여파로 한동안 보류되고 말았다.
결국 예정보다 늦어진 1972년에서야 일본 가와노에조기(川之江造機株式會社)에 발주할 수 있었다.
3월에는 품질관리와 제조 담당자를 일본 현지에 파견해 한 달 동안 기술연수를 실시했다.
2호기 설치공사는 1973년 3월 착수, 9월 시운전을 거쳐 11월에 준공했다.
이때 도입한 초지기는 단환망 콤비네이션형으로 지폭은 1,700mm, 생산능력은 연산 1만 8,000톤이었다.
대한팔프는 이례적으로 제지 2호기 준공식에 대내외 관계자들을 초청하고, 11월 7일 성대한 준공식을 치렀다.

의정부공장 2호기 준공식(1973. 11. 7)

사훈 및 사가 제정

대한팔프는 산업보국의 창업정신을 기반으로 구성원들의 구심점으로 작용 할 사훈을 ‘진실’로 정했다. 최화식 창업주가 가장 중시한 가치이자 평생의 좌우명이었던 진실은 55년 역사를 관통하는 정신으로서 계승 발전되고 있다.
사훈에 이어 사가도 제정했다. 박목월 시인이 작사하고 여기에 김진한 작가가 곡을 붙였다.
사가에는 산업보국의 창업정신과 기업의 사회적 역할 등 기업 사명과 함께 화합과 협력, 열정과 도전의 정신을 담았다.

대한팔프공업주식회사 사가 악보

기업공개(1975. 6)

1975년 6월 대한팔프는 국내 판지업계 최초로 기업공개를 단행했다. 창업 9년만의 일이었다.
기업공개는 1968년 정부가 「자본시장 육성에 관한 법률」을 제정 공포하면서 그 초석이 마련됐다.
정부는 기업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이익 배당금의 주식 처리, 조세 감면 등 각종 혜택을 부여했지만 기업공개에 선뜻 나서는 회사는 많지 않았다.
대한팔프는 창업 초기부터 기업공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회사의 기반을 닦고 경영 안정을 이룬 후 기업을 공개한다는 방침이었다.
이에 따라 1973년 본격적인 흑자경영 실현을 계기로 이듬해부터 기업공개를 적극적으로 준비했다

주식신규상장안내서 발행(1975. 6)

신양제지 인수(1976)

서울시 창동에 위치한 신양제지는 1967년 9월 설립한 범진제지공업주식회사가 그 전신이다.
공장 규모는 대지 1만 2,893㎡, 연면적 2,496㎡으로 공장동과 부속건물로 이루어졌으며, 생산능력은 일산 15~18톤, 연산 7,500톤의 규모였다.
신양제지는 제1차 오일쇼크 등의 여파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경영위기를 극복하지 못해 결국 1975년 도산, 성업공사에서 관리 중에 있었다.
신양제지 인수전에는 대한팔프를 비롯해 5개 회사가 응찰했으며 경합 끝에 대한팔프가 최종 인수하게 됐다.
이로써 대한팔프는 의정부공장 판지 1호기와 2호기, 신양제지 인수에 따른 판지생산용 초지기 1대를 포함해 모두 3대의 초지기를 갖추게 됐으며, 총 생산능력은 연산 5만 8,500톤에 달했다.
신양제지 인수 후 대한팔프는 약 4개월 동안 창동 소재의 공장 내 설비를 정비하고, 공장명을 서울공장으로 개칭했다.

서울공장 전경(1976. 6)

종이컵 원지 국산화(1977)

대한팔프는 1977년 국내 최초로 종이컵 원지를 개발하고 국산화에 성공했다.
자체 기술진에 의해 개발한 종이컵 원지 제조공법으로 특허도 냈다.
이 종이컵원지는 260g/㎡ 및 240g/㎡의 합지로 만들었다.
그동안 종이컵 원지는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국산화가 절실한 품목이었다.
특히 대한팔프가 개발한 종이컵 원지는 중간 공정이 불필요해 원가 절감이 가능하고 인체 무해성 등을 관계기관으로부터 획득하는 등 위생상 안전한 제품으로 평가받았다.
사용 후 폐기된 것은 종이원료로 재사용이 가능해 환경 측면에서도 고무적이었다.
대한팔프는 종이컵 원지에 대한 특허 취득과 함께 서울공장에 일산 30톤 규모의 생산설비를 갖췄다.

대한팔프 종이컵 원지 개발 관련 보도 (매일경제 1977. 1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