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화식 창업주의 삶과 꿈

사업보국의 뜻을 세우고 사람의 가치를 쌓다

  • 3. 꿈을 품고, 진실을 나누다

    최화식 창업주가 설립한 대한펄프의 등장과 함께 국내 판지업계는 비로소 기술과 품질을 내세우며 수출 산업화를 추진하는 시대를 맞았다. 평소에는 더없이 차분하지만 한 번 결단을 내리면 거침없이 사업을 성사시키는 최화식 창업주의 과단성이 없었다면 국내 제지업계의 성장과 발전도 몇 걸음 더디어졌을 것이다. 최화식 창업주는 창업 당시부터 국내 제지업계 시장을 세계로 확장하며 오늘의 깨끗한나라가 딛고 서야할 자리를 다지고, 미래 기업으로 향하는 교두보를 마련해나갔다. 1980년 11월 11일 향년 61세로 영면하기까지 제지업을 향한 그의 열정은 그가 꿈꿔오던 삶을 완성시켰다.

  • 14. 한국특수제지공업주식회사 출범과 대표이사 취임

    그 무렵 최화식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한국특수제지공업주식회사를 인수하는 문제였다. 사회가 차츰 안정화되고 국민소득이 증대되면서 종이류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특히 백상지의 수급 사정은 항상 불안한 상태였다. 국내 생산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수입 의존도가 날로 높아 갔다. 인쇄물 수요자들의 안목이 높아져 갱지로 불리는 신문용지를 일반 인쇄용지로 사용하기도 어려웠다. 갱지는 백상지에 비해 표면평활도 및 백상도, 잉크수리성 등이 낮아서 채색인쇄물은 물론 장서용 고급인쇄물 본문 용지로 사용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던 것이다.

    백상지를 자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 가운데 때마침 백상지 제조공장을 건설하려던 한국특수제지공업주식회사 장백용(張白龍) 사장이 새로운 사업가를 찾고 있었다. 공장 건설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단계에서 부지 매입과 공장건립에 따르는 자금을 확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최화식 창업주와 단사천(段泗川) 사장은 이에 비상한 관심을 갖게 됐다. 단사천은 황해도 해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이듬 해 해성직물상회와 해성미 싱상사 등을 자영하다가 해성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해 종이류 등을 수입하고 있었다.
    마침 그가 운영하는 해성미싱상사가 덕문상사와 가까운 거리인 청계천 5가 근방에 자리하고 있어 두 사람 사이가 매우 가까운 편이었다. 두 사람은 후일 한국특수제지 지배인으로 임명된 김종옥, 이수진 등의 중간 소개를 통해 백상지 공장 건설 사업의 인수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사업에는 양치목(楊致穆) 사장이 새로 동참하게 됐다. 그는 대구와 서울 을지로에서 16년 동안 미화상사를 자영하며 지류 도매업을 해 온 거상이었다. 국화산업에서도 수입지류를 인수하는 등 인연이 깊었다.

    이 밖에 김창윤(金昌潤)도 참여했다. 그는 여러 기업체를 자영하다가 이때는 단사천이 경영하는 해성산업의 부사장으로 종이류 등과 관련한 무역실무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들 4인이 공동 출자해 장백용 사장이 운영하던 한국특수제지공업주식회사를 인수하고 백상지 공장 건설 사업에 나섰다. 고급 인쇄용지를 국내 기술로 생산함으로써 수입 대체를 통한 외화 절감을 도모하고, 인쇄용지 공급의 원활화를 기해 국가 문화사업에 기여하자는 데 뜻을 같이 한 것이다.

    한국특수제지공업주식회사는 1958년 2월 25일 등기를 마치고 정식 출범했다. 최화식 창업주는 초대 대표이사 사장(1958. 4. 18~1961. 10. 31)에 취임해 공장건설사업과 운영 일체를 맡게 됐다. 당시 국내 제지업계의 여러 여건을 살펴볼 때 최화식 창업주는 남보다 앞선 전문경영자였고, 또 뒤에서는 단사천, 양치목 등의 조력이 컸기 때문에 사업기반을 성공적으로 조성할 수 있었다. 게다가 최화식 창업주는 자신이 경영하던 국화산업을 폐업하고 오직 한국특수제지의 공장건설에만 전념하기 시작했다.

    당시 국내 백상지 생산은 민간공장 3사(삼덕제지 안양공장, 청구제지 대구공장, 한국특수제지 안양공장)와 조폐공사의 관수용 생산으로 수요선을 상회하는 물량을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한국특수제지공업 안양공장 초지 1호기 준공식(1960. 3. 21)

  • 15. 투병 생활을 견디고 일어서다

    한국특수제지 안양공장은 최화식 사장의 노력이 주효하면서 1960년 7월부터 백상지 제품 생산을 본격적으로 개시하기에 이르렀다. 한국특수제지의 본격 가동으로 국내 백상지의 자급률은 1960년 64.1%에서 1961년 96.0%로 높아졌다. 정부는 백상지의 자급기반이 갖추어졌다고 판단하고 국내 백상지생산업계를 보호하기 위해서 1961년 1월부터 백상지의 수입을 전면 금지시켰다.

    한국특수제지는 1958년 7월 안양공장 부지 2만 평을 확보하고 본공장 1,567평 3층 건물을 비롯해 총 11동 2,340여 평에 이르는 건물 공사에 착수했다. 주문한 기계 완성품은 제1차 분이 1959년 6월 부산항에 도착했고 4차에 걸쳐 1960년 1월까지 모두 도착했다. 이에 따라 기계제작사인 스위스 엔지니어링 회사 에셔위스(Escher Wyss)의 기사장(技士長) 알프레드 로셀호이슬러(Alfled Rossenhoiusler)가 내한해 1959년 9월부터 약 8개월에 걸쳐 기계조립을 마쳤다. 1960년 3월에는 대부분의 시설이 완성됐고, 시운전을 위해 운전기사 에바하드 왓사맨(Eberhard Wassermann)이 내한해 기계운전을 지도했다. 아울러 기술진을 강화하기 위해 기원(技員) 최남두(崔南斗)가 1960년 2월 ICA자금에 의한 해외파견 기술자로 6개월 간 미국에 파견돼 기술을 습득했다.

    한국특수제지가 창업 초기의 경영상 어려움을 단기간에 극복하고 흑자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국내 수급 사정의 변화, 최신 설비에 의한 품질과 생산성 등 여러 여건에서 유리했던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최화식 사장의 불굴의 의지와 종업원들과 동고동락하는 동지적 애정에 힘입은 바 컸다. 종업원들은 그를 따랐고 존경했으며 회사 일을 내 일처럼 여겨 모두 열심이었다.

    그러나 신설 공장이 본격 가동한 지 1년 만에 흑자를 기록하는 등 경이적인 경영수완을 보여 오던 최화식 사장은 그 동안 건강이 크게 악화됐다. 서울적십자병원 내과 과장 설기동 박사로부터 과로에 의해 얻어진 병이라는 진단과 함께 모든 업무에서 손을 떼고 오직 치료에만 전념하라는 권고를 받으면서 더 이상 정상근무가 어렵게 됐다. 최화식 창업주가 병을 얻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일본 유학 시절 영양 섭취가 부족한 채로 간을 보호하지 못한 것이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다.

    때문에 최화식 창업주는 허약해진 간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 바 있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한국특수제지 설립 이후의 과로였다.

    한국특수제지는 경기도 안양역 부근에 공장 부지를 확보하고 조성공사에 이어 제지기계 조립 설치공사를 시작했는데 최화식 창업주는 종업원들을 진두지휘하면서 건설공기를 조금이라도 단축시키려고 강행군을 계속하며 창업 초기부터 무리했다.

    공사 기간이 단축되어 제품이 빨리 생산되면 그만큼 운영경비가 적게 들기 때문이었다.

    최화식 창업주는 만 3년 5개월 동안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한국특수제지의 기반을 완벽하게 다져 놓았으나 정작 자신의 건강을 해쳐 1961년 11월 초순에 대표이사직을 사임했다. 그 뒤를 이어 동회산업(東會産業)주식회사 최태묵 사장이 제2대 대표이사(1961. 11. 1~1967. 9. 8)에 취임했다. 최태묵 사장은 동흥유지공업사와 대동산업사를 자영하다가 최화식 창업주와 함께 국화산업을 이끌었으며, 1957년 8월에 동회산업을 설립해 독립했다.

  • 16. 제지업계를 떠나 일국증권주식회사를 설립하다

    최화식 창업주는 1960년대만 해도 거의 고치기 힘든 병을 앓았으나 다행히 완쾌됐다. 그러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사랑이 필요했다. 주치의의 정성 어린 치료, 부인의 헌신적 간병, 그리고 본인의 굳센 의지 덕분에 투병생활을 극복하고 몇 년 사이에 쾌유, 완치되어 건강을 되찾았다. 그러나 더 이상 치료에만 전념하며 세월을 보낼수만은 없었다. 최화식 창업주는 일국증권(一國證券)을 설립해 약 3년간 경영하는 등 제지업과 전혀 다른 분야로 들어섰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은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가장 격동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지만 곧 정치적 분열과 혼란이 계속되면서 군사정권이 출범하게 됐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행됐다.

    국내 금융기관은 대출여력이 부족하고, 증권시장도 자금조달 창구가 되지 못해 경제개발에 필요한 재원은 차관 등 외국자본에 의존해야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만이 우리가 살길이다’라며 강력한 수출주도 정책을 폈다. 1차에 이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에 9.7%의 경제성장을 기록했다. 특히 제조업 성장은 연평균 22%로 매우 높았고 이는 1970년대 고도성장의 발판이 됐다.

    1960년대에는 조금씩이나마 주식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명동시대’로 통하던 거래소에서 상장된 총 12개 기업06) 종목이 초기 거래 대상이었다.

    1962년 「증권거래법」에 의해 대한증권거래소가 ‘주식회사’로 개편됐다. 지분을 많이 소유하면 대주주가 될 수 있었고, 증권시장제도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기에 대한증권거래소 주식 투기가 시작됐다. 1962년 연초 90전에서 3월말 9환 20전으로 3개월만에 10배, 4월 말에는 60환으로 66배 폭등했다. 금융권의 긴급자금을 받아 간신히 위기를 넘겼으나 이 사건을 통해 증권시장은 믿을 수 없는 투기판이라는 인상이 퍼졌고, 제 기능을 찾기까지 10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1962년 6월 10일 통화개혁 조치로 원화를 10분의 1로 절하하고 화폐 호칭은 ‘환’에서 ‘원’으로 변경했다. 이에 적응하기 위해 증권시장은 33일 동안 휴장했다.

    1962년 6월 창립한 일국증권주식회사는 자본시장의 개척시기부터 기업의 자금조달과 투자자의 재산운용에 관련된 업무를 주로 담당했다. 설립 당시에는 증권시장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으므로 모험적인 기업으로 유가증권의 거래업무나 사채 발행 등에 따른 여러 가지 업무를 수행하며 3년간 운영됐다. 일국증권은 1985년 사명을 동양투자금융으로 변경한 뒤 동양증권을 거쳐 2014년 대만의 유안타증권(元大證券)에 인수됐다.

    06) 조흥은행, 상업은행, 저축은행, 흥업은행, 대한해운공사, 대한조선공사, 경성전기, 남선전기, 조선운수, 경성방직, 대한증권거래소, 한국연합증권

  • 17. 대한팔프공업주식회사의 출범

    일국증권주식회사를 경영하는 3년 동안 최화식 창업주는 증권업만으로는 제지업에 대한 열망을 달랠 수 없었다. 제지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 없었던 그는 제지업계로의 재진출을 조용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동안에도 제지업계는 조금씩 변모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일정 역할을 담당한 성과들을 일궈내는 동안 최화식 창업주는 초심을 잃지 않고 지켜온 신념이 있었다. 제지업에 대한 열정과 함께 지속적인 나라의 번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땅에 문화 부흥을 일으켜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그는 문화의 근간인 제지사업에 진출하기로 결심했다.

    종이는 당시 시량(柴糧, 땔나무와 먹을 양식)과 더불어 생활필수품에 속했다. 전쟁이 멈추고 국민의 생활양식이 달라짐에 따라 수요가 증대하고 제품도 고급화, 다양화하는 추세였다. 따라서 상품의 부가가치를 높임과 동시에 생활의 질을 향상시켜 주는 제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또 그 수요가 날로 폭발적인 증가추세를 이어갔기 때문에 제지산업은 국가적 기간산업으로 꼽히며 정책적 육성책이 마련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미 자리가 잡혀가고 있는 신문용지 및 백상지 업계에 뛰어들기도 난처한 점이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펄프’였다. 국내 제지산업이 본궤도에 올라 지류의 자급률이 높아짐에 따라 펄프의 수입금액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펄프의 국산화사업을 추진하게 됐으며 이를 계획 시행하는 업체에 대해서는 자금을 지원하는 등 각종 혜택을 약속했다. 최화식 사장은 펄프의 국산화사업이 장래가 기대되는 유망업종인데다가 국가시책에도 부응한다는 점을 중시하고 펄프의 국산화사업을 추진하기로 계획했다. 이런 취지에서 펄프제조를 제1의 사업목표로 내세운 <대한팔프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66년 3월 7일자로 등기를 마쳤다. 이사진으로는 최명진, 정진숙, 김창윤, 박문상(이상 1966. 7. 27 사임), 이종선, 안영복, 김승무, 감사에 최태묵을 선임했다.

    창업 당시 주요 임직원은 전무이사 안영복, 상무이사 김승무, 공장장 고오석(高午錫), 총무부장 박희봉 외에 이사 강형석과 이종선이었다.

    이들 가운데 최화식 창업주와 함께 공동 출자한 주주는 전무이사 안영복(安永福), 이사 강형석(姜亨錫), 이사 이종선(李鍾善) 3인이었다. 이종선은 부산 국화무역 시절 부사장을 맡아 동업한 관계였고, 안영복은 경남 양산 출신으로 부산수산대학교 조선공학과를 졸업하고 6・25 동란이 한창 중이던 무렵 부산에서 국화산업에 입사해 무역과장을 지내다가 대한팔프 창업 당시 공동 주주로 전무이사에 선임됐다.

    홍콩, 미국, 독일, 중국 등을 다녀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최화식 창업주 여권

  • 18. 볏짚 펄프와 조치원공장 부지 매각

    대한팔프 설비 당시 기술담당자였던 최남두(崔南斗)가 1967년 7월 18일 사임하고, 고오석이 입사했다. 인하대학교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고오석 공장장은 1966년 볏집펄프 전문가로 대한팔프 공장장에 임명됐으며 1969년 10월에는 감사로 선임됐다.

    볏짚 펄프 국산화는 당시 정부의 큰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다. 국내에서 조달할 수 있는 원부자재인 볏짚과 보릿짚을 활용해 펄프를 생산할 수 있다면 어려운 외화 사정을 이겨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67년 5월 29일 박충훈 상공부장관이 기자회견을 갖고 농공병진정책의 일환으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에 12개 볏짚펄프공장을 전국 주요 미곡생산지역에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국책사업 가운데 하나로 이를 반영하기 위해 정부는 타당성 여부를 제지연합회에 문의했고, 연합회는 다시 고오석 공장장에게 문의했으나 불가능하다는 결론이었다. 미국의 스미스 헤치만 사에 의뢰했던 용역 결과도 부정적인 회신을 내놓았다. 걸림돌이 된 것은 원료 확보와 이에 대한 수송 대책이 가장 긴요한 문제였다. 1모작을 하는 온대지방에서는 펄프 생산에 필요한 볏짚 물량을 수집하기 어렵기 때문에 1년초(草)의 펄프화는 3모작이 가능한 아열대지방에서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펄프 1톤을 만드는데 필요한 볏짚은 3톤이었다. 볏짚은 부피가 커서 5톤 트럭에 가득 실을 수 있는 양이 2.5톤에 불과해서 트럭 한 대가 움직여도 펄프 1톤을 만들기에 역부족이었다. 이런 식이라면 20톤이나 10톤 규모의 공장을 만들려면 5톤 트럭 25대가 매일 수송해야 한다는 계산인데, 과연 그만한 양이 있는가도 문제였다.

    최화식 창업주는 고오석 공장장이 개진한 볏짚 국산화 불가 의견을 채택하고, 대한팔프의 주요 생산품목을 백판지로 변경하기로 결론 내렸다. 이에 따라 평택평야에서 원료 공급이 용이할 것으로 보고 이미 확보했던 2만여 평의 조치원역 인근 공장부지를 매각하고 새로운 부지를 물색했다.

    볏짚 펄프 국산화는 1973년 제1차 석유파동, 평가교수단의 의견을 따라 수입원료의 국산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이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해 청와대에서는 잠정기구로 자원절약위원회를 설치했으나 곧 폐쇄됐다. 이후 상공부 업무 일부를 흡수해 볏짚 펄프 국산화추진과를 설치했다. 청와대는 제1사업으로 볏짚 펄프 국산화를 추진하기 위해 전문가를 비롯해 업계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의견을 청취했다. 정부는 공장 건설 지원을 약속했으며, 7개 사가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당장 펄프 공업을 일으킬 수 없다면 우선 손쉽고 현실적으로 용이한 볏짚 펄프의 이용도를 제고해야 한다는 것이 제지업계 일각의 여론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처음 설립 된 볏짚 펄프 생산공장인 진주 소재 마전(麻展)펄프를 비롯해 원주의 한성펄프 등이 사업 계획과 실적에서 차이를 드러내며 모두 도산했기 때문에 관계 부처는 선뜻 지원에 나서기 어려웠다.

  • 19. 생산품목을 판지로 변경하고, 의정부 공장을 짓다

    대한팔프공업주식회사는 당초 계획이었던 펄프 제조업 생산에서 판지 생산으로 목표를 전환했다. 정부는 수출입국을 국가지상 목표로 삼고 있었으며 수출산업도 판지의 수요가 격증되는 추세였기 때문에 판지생산업은 앞날이 매우 유망한 업종으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기존업체들의 시설은 규모가 작고 영세해서 충분히 경쟁력이 있을 것으로 전망됐다.

    생산품목을 백판지로 전환함에 따라 공장 부지 물색에 새로운 전제 조건이 따랐다. 즉 주원료인 고지(古紙) 수급이 원활한 대도시 인근, 가능하다면 서울 근교이어야 했다. 당시만 해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이었으므로 교통 문제가 중시됐던 것이다. 이에 따라 시흥의 기아공장 터와 도봉산 부근의 삼양라면 공장 자리가 물망에 올랐지만 추가적으로 서울 근교를 더 둘러본 다음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53의 1을 새로운 공장 부지로 최종 결정했다. 우선 중량천 상류에서 공업용수를 끌어오기 쉬웠고, 고폐지 수집은 물론 전기 사정도 좋았다. 야산 자락에 위치해 평당 930원에 매입할 수 있는 땅값도 유리한 조건이었다. 실평수 1만 8,000여 평에 용수 파이프 매설부지 등을 포함해 약 2만 평의 부지를 매입했다.

    1호기 시설로 서독에 발주한 기계가 도착했고, 대일청구권 자금 5만 달러로 국산화가 어려운 판지 기계의 주요 설비(양키 드라이어, VS모터, 칼렌더, 디와인더 등)도 발주했다. 그 밖에 대한팔프 기술진의 설계로 대한조선공사(大韓造船公社)에서 설비를 제작해 국산화 비중이 80%를 웃돌았는데, 이는 국내 제지업계에서 최초로 시도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제품 생산은 연산 2만 톤(일산 30톤)의 판지와 수출용 포장 상자, 백판지 라이너(골판지 원지)를 교대로 제조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창업 초기에 해당하는 1968년과 1969년, 2년 동안에는 판매 부진을 겪으면서 막대한 적자를 기록했다.

    기술은 있으나 자금이 부족했던 대한팔프는 1970년 수출용 포장상자 시설을 개선하기 위한 용도로 현금 차관 100만 달러를 받았다. 당시 최화식 창업주는 고오석 공장장과 함께 청와대에 이 문제를 건의하기 위해 일곱 차례 방문한 끝에 차관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자금을 통해 사채(私債)를 갚을 수 있었고, 1971년에는 엄청난 흑자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특히 그 해 3월 최화식 창업주는 한국제지공업연합회 회장으로 선임되어 지종별 5개분과위원회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기수이자 가이더 역할을 했다. 이제 막 50대에 들어섰으나 제지업계에서 ‘최화식’은 이미 ‘원로급 실무이론가’로 통하고 있을 만큼 명망이 높았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 제지공업에 새로운 바람이 이는 곳이면 언제나 그가 있었고, 또 한국골판지협회 회장직도 겸하면서 제지업 육성에 그만큼 힘쓴 이도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1년부터 추진한 2호기 증설 계획은 잠정 보류됐다. 1970년부터 경제성장률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경제가 침체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금본위제도를 일시적으로 정지시킨, 이른바 ‘닉슨쇼크’가 미친 영향 탓이었다. 1971년 8월 닉슨 미국 대통령은 이제 미국이 더 이상 달러를 금으로 바꾸어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이 일로 세계 경제는 큰 혼란을 겪었다. 전 세계의 물가와 원유의 가격이 급격하게 상승했고, 경제성장률은 하락했다.

    당시 경기침체는 외부적으로는 미국의 금본위제도 포기로 인한(닉슨 쇼크) 불안정성 때문이었고 내부적으로는 비제도화되고 낙후된 금융 인프라 때문이었다. 우선 은행에 자금이 그리 많지 않아서 대출받기가 쉽지 않았던 데다가 1962년 4대 의혹 사건의 여파로 주식시장이 위험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투자자들이 주식시장에 투자하기를 꺼려해 많은 기업들이 사채로 돈을 꾸었는데 사채가 워낙 고이율이었기 때문에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는 기업들이 속출하면서 기업들의 자금난이 심해졌던 것이었다. 결국 2호기는 1972년 일본 가와노에조기(川之江造機)주식회사로부터 단환망 콤비네이션을 들여와 1973년 9월 시운전을 마치고 가동에 들어갔다. 마침 종이류 수요가 폭발적으로 일어나 대한팔프는 같은 해 10월 3개월 동안 제지업계 사상 이례적인 흑자를 기록했고, 생산능력도 크게 늘어났다.

    1975년 1월에는 신양제지를 인수하고, 국내 판지업계 최초로 기업을 공개했다. 도봉구 창동 샘표공장 자리에 소재한 신양제지의 생산설비는 1981년 4월에 의정부공장으로 이설됐다.

    의정부공장 2호기 준공식에 참석한 대만 공상계 명인 호주조(胡珠照)와 함께한 최화식 창업주

  • 20. 창업주의 영면, 삶을 완성하고 꿈을 남기다

    최화식 창업주가 향년 61세로 영면한 것은 1980년 11월 11일 새벽이었다. 그 하루 전인 월요일, 여느 때처럼 한 주를 시작하는 회의를 주관하다가 쓰러져 고려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안타깝게 회복하지 못하고 타계한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일생을 제지업 가까이에서 떠나지 않았던 고인의 갑작스러운 비보는 남은 사람들에게 더없이 커다란 슬픔이었다.

    고인을 잃은 슬픔은 어떠한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생전에 최화식 창업주는 명륜동 자택에서 가까운 혜화동성당 앞을 지나칠 때마다 이정숙 여사에게 “우리도 곧 성당 나갑시다”하고 다정히 말하고는 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성당에 나가기 전에 세상과 작별하고 만 것이다. 임종을 준비하라는 의사의 말을 들은 가족들이 혜화동성당의 신부님을 모셔와서 영세를 받을 수 있었다. 11월 13일 오전 9시 혜화동성당에서 영결미사를 마친 운구 차량이 의정부공장으로 향했다. 오전 11시 영결식이 시작됐고, 장지는 경기도 용인군 신갈 선영이었다.

    장례식은 회사장으로 엄숙하게 진행됐다. 아침 조회 석상에서 마지막으로 녹음된 고인의 육성이 영결식장에 참석한 이들의 애도와 함께 했다. 장지로 출발하기 위해 회사 뜰에서 기다릴 때도 확성기를 통해 창업주의 음성을 모든 조문객이 함께 들을 수 있었다. 생전에 최화식 창업주는 대한팔프의 외형적인 성장에만 치중하지 않고 기업의 미래 성장을 담보할 수 있는 내적 가치를 축적하는 데 각별한 애정을 기울였다. 사내 구성원들의 화합을 통해 기업문화를 내면화했으며, 서로 아끼고 돕는 협력을 통해 풍요로운 기업 정신을 가꾸었다.

    아울러 국내 제지업이 나아가야 할 길을 세계 시장으로 넓히는 원대한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창업 초기부터 수출을 염두에 두고 시설 투자를 아끼지 않았으며, 철저한 사전 준비와 시장 조사를 바탕으로 글로벌 기업의 틀을 닦았다. 사업 초기부터 홍콩 등 동남아 현지를 중심으로 전개된 활발한 수출 전략은 1970년대 이후 대한팔프 성장의 원동력이자 교두보였다.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에 이어 10·26사태가 가져온 정국의 혼란으로 우리나라 경제는 경제개발계획 실시 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과다한 시설 확충으로 공급과잉 사태를 초래해 경쟁이 치열해진 제지업계도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었기에 최화식 창업주의 빈자리가 더욱 컸다.

    화식 창업주가 설립한 대한팔프의 등장과 함께 국내 판지업계는 비로소 기술과 품질을 내세우며 수출산업화를 추진하는 시대를 맞았다. 정부의 산업합리화 정책을 앞당기기 위해 제지업체가 저마다 국제 수준에 이를 수 있는 적정 규모의 성장을 추진하는 가운데, 대한팔프가 앞장서 과감한 시설 확장에 나섬으로써 그동안 내수산업에 그쳤던 제지업을 일약 수출산업으로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73년 초에 1일 생산능력을 60톤에서 120톤으로 배가하기 위해 내외자 약 10억 원을 투입해 2호 초지기, 에어 나이프 코터 등의 시설을 갖출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최화식 창업주의 과감한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평소에는 더없이 차분하지만 한 번 결단을 내리면 앞뒤 재지 않고 추진력을 발휘해 거침없이 사업을 성사시키는 최화식 창업주의 과단성이 없었다면 대한팔프는 물론 국내 제지업계의 성장과 발전도 몇 걸음 뒤졌을 것이 일반적인 중론이었다.

    최화식 창업주는 창업 당시부터 제지업계의 시계(視界)를 세계무대로 확장함으로써 오늘의 깨끗한나라가 딛고 서야할 자리를 다지고, 미래 기업으로 향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진실한 기업인이었다. 덕을 베풀고 마음을 전하는 데 있어 가리고 따짐이 없었던 고인의 넋을 기리고 유족을 위로하기 위한 정치인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되갚을 수 없는 큰 빚을 그에게 졌다. 최화식 창업주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곁을 떠난 그 날은 그의 열정이 심은 한 시대의 가치관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재확인된 날이기도 했다. 제지업을 향한 그의 열정은 그가 꿈꿔오던 삶을 완성시켰다. 그 꿈은 깨끗한나라의 기업 정신을 굳건하게 지탱하고 있는 종이문화 산업의 근간이 됐다.

    가족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최화식 창업주
    (아래쪽 왼쪽에서 첫 번째 최화식 창업주, 위쪽 왼쪽에서 두 번째 최병민 회장, 아래쪽 왼쪽에서 두 번째 아이 최현수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