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화식 창업주의 삶과 꿈

사업보국의 뜻을 세우고 사람의 가치를 쌓다

  • 2. 사람을 얻고, 함께 나아가다

    최화식 창업주에게는 특별히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천품으로 타고난 차분한 대중성이 있었고, 작은 물건 하나를 팔더라도 믿음직한 성실이 있었다. 여기에 남다른 두뇌와 비상한 노력이 더해졌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자신이 지식을 통해 배운 것보다 삶으로부터 간곡하게 체험한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최화식 창업주는 자신의 타고난 재능에 경험을 더하고,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덕문상사의 문을 열었고, 피난지 부산에서 6・25를 겪은 뒤 서울로 돌아와 무역회사 국화산업을 설립했다.

  • 08. 자연으로부터 타고난 상재(商才)

    혼인식을 마친 최화식 창업주는 종로 효제동으로 살림집을 옮겼다. 그 무렵 처가에서는 문방구를 꾸려가고 있었는데 가계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아 실상 있으나 마나 할 정도였다.

    최화식은 우선 문방구부터 살릴 방안을 궁리에 나섰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처조카가 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던 중에 문득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일본에서 공부하던 시절 길에서 조카 또래의 아이들이 얼굴에 동물 모양의 탈(Mask)을 쓰고 놀던 모습이 생각났던 것이다. 일본에 있는 친구에게 그 탈을 보내 달라고 곧바로 부탁했다.
    일본에서 도착한 탈을 어린 조카 얼굴에 씌워 밖으로 내보냈다.

    “아이들이 어디서 산 것이냐고 물어보면 아이들을 가게로 데려와라.”

    예상했던 대로 조카를 따라 아이들이 몰려왔다. 최화식은 여러 종류의 종이탈을 보여주며 말했다.

    “갖고 싶으면 엄마와 같이 오너라.”

    기발한 아이디어는 적중했다. 아이들 손에 이끌려 가게에 온 엄마들은 탈만 산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학용품도 함께 샀던 것이다. 문방구는 오래지 않아 다시 활기를 찾으며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공부하고 왔다는 사실 하나에 희망을 걸고 사위를 맞이한 빙모의 판단이 옳았던 것이다.

    최화식 창업주에게는 특별히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천품으로 타고난 차분한 대중성이 있었고, 작은 물건 하나를 팔더라도 믿음직한 성실이 있었다. 여기에 남다른 두뇌와 비상한 노력이 더해졌으니, 그에게 재능이란 배우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상술(商術)이 아닌 상재(商才)로 다방면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자신이 지식을 통해 배운 것보다 삶으로부터 간곡하게 획득한 강한 체험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최화식 창업주는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길러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힘쓰기 시작했다. 덕문상사의 출발이 그러했다.

    청년 시절의 최화식 창업주

  • 09. 문구도매상 덕문상사(德文商社)를 열고, 6·25를 겪다

    최화식 창업주가 어린 시절 화신백화점에서 일하면서 문방구류를 익히고 배운 전문 지식은 그의 머리가 아니라 몸에 깊이 각인되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이처럼 살아있는 지식을 기반으로 광복 이듬해인 1947년 서울 종로5가 큰 길가에 문방구 도소매업을 전문으로 하는 ‘덕문상사(德文商社)’를 설립, 자영하기 시작했다. 월급을 받는 직장인에서 스스로 모든 일을 경영해나가야 하는 사업가로 변신했던 것이다.

    덕문상사는 기업가로서 최화식 창업주의 일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거래 규모와 상관없이, 종이류의 국내 판로를 익히는 계기가 됐을 뿐만 아니라 이후 대한팔프를 함께 이끌어 갈 인맥을 구축하는 데도 대단한 도움이 됐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1966년 대한팔프 설립 당시부터 함께 한 김승무(金昇武, 1930) 상무이사였다. 함경남도 북청 출신인 그는 17세이던 1947년 가을에 단신으로 월남한 뒤 종로5가 덕문상사의 점원으로 입사하면서 최화식 창업주와 인연을 맺게 됐다.

    당시 서울에는 홍원상사, 영화문구, 덕문상사 등 3대 문구류 도매상이 있었다. 이들 3대 문구류 도매상들은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이 방면의 거상들이었다. 그렇지만 경험이 적고 자금이 영세한 덕문상사는 좀처럼 상권을 확장해 나가기 어려웠다.

    최화식 창업주는 이에 굴하지 않고 오직 신용과 성실로 맞섰다. 고객을 주인으로 대했으며 봉사와 희생정신으로 그들을 도왔다. 그 결과 소문이 차츰 퍼지면서 견실하게 발전해 갔다.

    6・25 전란 중에는 종로5가 일대가 모두 폭격으로 폐허가 됐지만 덕문상사와 또 하나의 상점만이 고스란히 전화를 면할 수 있었다. 병화(兵火)로부터 덕문상사를 지킨 사람이 바로 김승무였다. 종로5가 일대에 가해진 폭격으로 줄지어 선 상점들은 대부분 폐허를 면하지 못했다. 덕문상사 역시 불길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홀로 가게를 지키던 김승무가 불을 끄기 위해 동분서주한 덕분에 가까스로 화를 면한 것이었다. 종로에 소문이 날 정도로 대단한 활약이었다.

    최화식 창업주는 당일 처가 식구들이 있는 답십리로 일시 피했다가 이튿날 현장으로 돌아왔다. 그의 눈앞에 덕문상사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멀쩡했다. 이를 보는 동네 사람들이 모두 감탄할 정도였다. 덕문상사의 재산을 온전히 지킨 주역이었던 김승무에 대한 최화식 창업주의 신임 또한 더욱 두터워질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자 피난길에 오른 최화식 창업주는 덕문상사 또한 부득불 부산시 중앙동으로 옮겼다. 김승무는 전쟁이 발발한 그 해 12월 군에 입대해 이듬해인 1951년 3월에 소위로 임관했으며, 1956년 3월 대위로 전역과 동시에 설립 2년째를 맞이한 국화산업에 입사해 최화식 창업주와 다시 만났다.

    김승무는 그 후로도 최화식 창업주와 동고동락하며 제지업계에서 사업을 이어갔다.
    1958년 한국특수제공업주식회사의 출범을 앞두었을 무렵에는 국화산업에 적을 두고 외자도입 업무와 L/C 개설 등 한국특수제지의 외자를 담당했으며, 일국증권 창립과 함께 상무에 선임했다. 1975년 초 대한팔프가 기업 공개를 준비하며 부사장제를 도입하면서 부사장으로 임명된 것도 그였다. 특히 영업 정책에 밝고 수에도 남보다 회전이 빠른 데다 조직을 섬세하게 관리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최화식 창업주는 퇴직하는 김승무 부사장에게 그동안 대한팔프에서 생산해오던 골판지 가공을 맡겼다. 김승무가 독립체인 대영포장주식회사를 설립, 자영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 10. 피난지 부산에서의 생활

    피난지 부산의 산 중턱에 마련한 집 마루에서 앞을 내려다보면 멀리 바다가 보였다.
    넘실대는 바다의 물결이 보였고 파도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런 풍경 속에서도 전선은 계속됐다.

    아이들이 학업을 계속한 피난지 학교는 이름 그대로 피난민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임시로 마련한 건물에 불과했지만 바닷가에 있어서 경치가 아름다웠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도 별로 춥지 않아 아이들에게는 유일한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가장 무서운 곳은 높은 방파제 위에 지어진 학교 화장실이었다. 발을 딛고 올라서야 할 자리가 나무판으로 적당히 지어져 고정되어 있지 않고 이리저리 움직여 조심조심 올라서야 했다. 아이들은 신발에 오물이 묻지 않게 하려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밑에서 바람이 세게 불면 여학생의 치마가 낙하산처럼 위로 활짝 펴지고 몸이 위로 붕 뜰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바로 밑은 낭떠러지로 넘실거리는 큰 파도가 힘차게 밀려오다 철썩하고 방파제에 부딪치면 물보라를 뿌리며 부서져 내렸다.

    최화식 창업주는 산 중턱에 기거할 집을 마련했다. 올라가려면 높은 층계가 있고 바로 그 옆에는 깨끗한 약수터가 하나 있었다. 평소에는 물이 고여 있었지만, 한여름에 오랫동안 계속해 비가 오지 않아 가물 때는 물이 고이기를 기다려야 했다. 바닥은 시멘트로 되어 있었고 어린 아이들도 바가지로 물이 조금씩 고이는 대로 주전자나 물통에 퍼 담을 수 있었다. 수십 명의 동네 사람들이 한 통씩 물을 퍼 가기 위해 뙤약볕에서 30분에서 1시간씩 기다려야 했다. 아이들도 주전자를 한 개씩 들고 서 있다가 차례가 되면 물이 고일 때를 기다려 바가지로 주전자에 퍼 담았다. 온 식구가 얼음물처럼 시원한 그 물을 달게 마셨다.

    때로는 즐거운 일도 없지 않았다. 아이들에게는 또래들과 함께 시원한 바람을 쐬며 멀리까지 넘실대는 푸른 바다를 보며 파도 소리를 듣는 것이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파도 소리 외에도 뜻하지 않은 즐거움이 찾아오기도 했다. 최화식 창업주가 주말에 온 가족을 부산 해운대에 있는 외교구락부에 데려갈 때가 그랬다. 손님들이 주로 서양인들인 구락부는 회원권이 있어야만 입장이 가능한 곳이었다. 최화식 창업주가 서양인들을 만나 회의를 거듭하는 동안 동반한 아이들의 얼굴은 구김살 하나 없이 밝았다. 피난지에서도 사업에 여념이 없던 어른 덕분에 전란 중에도 아이들은 파도 소리 외에도 뜻하지 않은 즐거움을 더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 11. 이정숙 여사의 외유내강

    최화식 창업주와 이정숙 여사는 슬하에 3남 2녀, 모두 5남매를 두었다. 그들 모두 얼굴과 웃는 모습과 성격, 인품 등에서 최화식 창업주를 여러 면으로 꼭 닮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 남매와 가까이 지낸 사촌형제들은 마치 최화식 창업주를 뵙는 것 같다고 말한다.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조카가 일시 귀국한 적이 있었다. 마침 이정숙 여사가 병원에서 갑상선 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었다. 조카는 병원에 가면 이모부(최화식 창업주)도 함께 뵐 수 있을 것으로 알았으나 병실에서 볼 수 없었다. 이모부께 인사를 드려야 할 텐데 어디 계신가 묻자, 일본에 가셨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놀란 조카가 “어머! 이모님이 수술을 받으시는데도요?”하고 되물었다. 그러자 이정숙 여사의 대답이 태연했다.

    “그럼, 일부러 기다렸다가 일본에 나가신 사이에 수술받은 거야. 그렇지 않으면 이모부가 병원 오시느라 피곤하고 불편하실 테니까.”

    사업가를 남편으로 둔 이정숙 여사의 속 깊은 배려는 그런 식이었다. 조카는 새삼 이모의 사려 깊음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카가 알고 있는 이모는 몸이 아파도 남에게 아픈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분이었다. 어지간한 병에는 병원을 찾지도 않았으니, 온유한 겉모습과 함께 강단 있는 속을 지닌 여성이었다.

    조카의 눈에 이정숙 여사는 깔끔한 성격에 집안을 아름답고 품위 있게 장식해서 배울 점이 참으로 많은 이모였다. 옷도 늘 고상하고 예쁘게 입는 멋쟁이였다. 한 번은 이모부와 모임에 가야 한다며 정장을 차려 입고 나왔는데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아름다워 보였다고 한다. 날씬하고 살결이 흰 이정숙 여사에게 잘 어울리는 옷이었던 것이다.

    이정숙 여사는 어릴 적부터 글씨를 예쁘게 썼고, 붓글씨를 열심히 배우며 마음을 수련한 분이었다. 한 번은 조카가 “성경 구절을 하나 써주세요. 저희 집에 걸어 놓을게요”하고 청한 적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나중에 방문했을 때 시편 1편을 쓴 액자를 전하며 “내가 쓴 것보다 내 스승님이 쓰신 것이 더 좋아서 그걸 갖고 왔다”고 말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처럼 겸손하고, 깔끔하고 단정한 분이었던 이정숙 여사는 2017년 6월 22일 별세했다.

    결혼 10주년 기념(1954. 11. 27, 오른쪽 첫 번째가 최병민 회장)

  • 12.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 이모부 최화식

    많은 사람들이 최화식 창업주 내외를 유별나게 따랐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함께한 조카는 이런 이야기를 남겼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이모부(최화식 창업주)!’라고 말한다. 이모부는 1960년대부터 이미 한국 기업사, 특히 제지업계에 익히 알려진 덕망 높은 분이셨다.”

    최화식 창업주의 조카는 어린 시절 이모부가 기업인으로서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 얼마나 뛰어난 경영 능력과 리더십을 지니신 분인지는 잘 몰랐다. 하지만 성장하는동안 그 어느 누구보다 조카가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점이 있다. 이모부의 인간됨, 존경하고 본받고 싶은 한 인간으로서 그 분이 조카에게 베풀어준 따뜻한 사랑이었다. 조카는 이모부의 타고난 품성이 지닌 따뜻함을 실감하고 누린 것이 비단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는지 되묻고 있다. 조카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기억할 때 특별히 인상 깊은 장면이 하나 있는데, 1957년 여름 방학에 겪은 일이었다.

    방학을 맞아 이모부의 집에 놀러간 조카가 이종사촌들과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모부의 화난 소리가 들렸다. 조카는 이모부 댁에 자주 갔어도 그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이라서 ‘단단히 화가 나셨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잠시 후 아주 조용해졌다. 두 시간이 더 지났을 무렵 밥파(당시에는 집안일을 돕는 가정부 아주머니를 그렇게 부르고는 했다.)로부터 모두 할머니 방에 모이라는 전언이 들렸다. 할머니 방에 모두 모였다. 조금 있으니 최화식 창업주와 이정숙 여사도 함께 들어왔다. 최화식 창업주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그의 빙모 앞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하고 앉았다.

    “어머니! 불효를 용서해 주십시오. 아무리 화가 났어도 어머니 앞에서는 참아야 했는데 큰 소리를 내게 되어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다시는 없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괜찮네! 자네도 사람인데 왜 화날 때가 없겠나! 다 이해하니 염려 말게!”

    “아닙니다. 제 잘못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명심하겠습니다.”

    그런 뒤에 최화식 창업주는 자신의 딸과 조카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한테도 아빠가 잘못했다. 너희들도 많이 놀랐지!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테니 안심해라. 사과하는 의미에서 오늘 아빠가 좋은 식당에 가서 맛있는 것 사줄 테니 맛있게 먹자. 자, 준비하고 30분 후에 떠나기로 하자”

    이정숙 여사가 덧붙여 말했다.

    “어머니!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하면서 모친의 방을 나간 것이다.

    이전에는 그렇게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없고 이후로도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최화식 창업주는 설날 명절과 빙모 생신에는 물론, 해외로 출국을 앞두고는 항상 빙모 방에 들려 큰절을 올리고 떠났다. 귀국할 때 무슨 선물을 드리면 좋을지, 혹시라도 원하시는 선물이 있으신지 물었고, 그때마다 어른의 대답 또한 늘 같았다.

    “선물은 무슨 선물! 먼 길을 떠나면 피곤할 텐데 자네만 무사하고 몸 건강하게 잘 다녀오면 되네.”

    최화식 창업주는 해외에서 귀국하면 옷을 갈아입고 가장 먼저 빙모 방에 들렀다.

    그런 때면 자연스럽게 온 식구가 그 방에 모였다. 사업이든 학업이든 해외에 나가는 사람이 드문 시절이었다. 최화식 창업주는 모여 앉은 가족들에게 해외에서 경험한 여러 이야기를 차근차근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선물 보따리를 빙모 앞에 풀고 나면 가장 먼저 빙모께서 원하는 선물을 택하시도록 했다. 그런 뒤에 아이들 선물은 할머니께서 나누어 주시도록 할머니 방에 놓고 나가셨다. 그렇게 배려함으로써 할머니의 위엄을 높여드리고 아울러 집안 어른의 존재감을 높여드렸다.

    최화식 창업주는 이정숙 여사와 이야기를 나눌 때는 옆에 앉은 사람도 거의 듣지 못할 정도로 항상 조용조용히 말소리를 낮추고는 했다. 자녀를 위해 최선을 다하되 너를 위해 얼마를 썼다, 너에게 얼마가 들었다는 등의 공치사는 자식들에게 하지 못하도록 했다. 독학으로 공부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에 자녀들에게도 늘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조카는 후일 생각해도 이모부께서는 마음과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참으로 어른스러운 분이셨다고 기억하고 있다. 조카는 그런 이모부가 늘 자랑스러웠다. 본받아야 할 어른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6・25 전쟁 피난 시절 부산에서 초등학교 1년 동안을 함께 지낸 조카는 최화식 창업주로부터 늘 특별한 아낌을 받았다. “이모부께서는 외국에서 오실 때는 내 선물을 잊지 않고 챙겨 오셨다. 그 분이 챙겨야 할 주변 분들이 하나둘이 아니었을 텐데도 말이다. 그 분의 사업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어 드리지 못하는 이 어린 조카에게!” 그 조카는 자신이 이모부 나이가 됐어도 그 분의 호(號)인 ‘ 덕문(德文)’이 지닌 참뜻에 이르기가 참으로 어렵다고 한다.

  • 13. 서울로 돌아와 무역회사 국화산업을 설립하다

    최화식 창업주는 1950년 가을 덕문상사를 서울에서 부산시 중앙동으로 사업장을 이전해 사업부문의 내실을 기하면서, 앞으로 경영활동에 협력관계를 맺게 될 인간관계를 구축해 나갔다. 특히 일광상회라는 문방구상과 거래를 트면서 경영주 이종선과 친교가 두터워졌다. 일광상회는 덕문상사의 물품을 다양하게 취급했다.

    유엔군이 북진을 계속해 이제 북한 전역을 공산 치하에서 완전 해방하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피난민들 사이에 머지않아 서울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가득했다. 하지만 최화식 창업주는 생각을 달리했다.

    1950년에 밀어닥친 6・25동란의 폭풍에 가뜩이나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던 국내공업은 또다시 커다란 타격을 입어, 공장건물의 44%, 전 산업시설의 42%가 파괴되었는데 여기에 문구업계의 생산시설 역시 포함됐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아무튼 6・25동란부터 1953년 7월 휴전이 성립되기까지는 거의 모든 공업이 올스톱 상태에 있었다. 그러다가 휴전이 되고 본격적인 전후 복구가 시작되면서 해외 원조와 정부의 재정 투·융자에 의한 활발한 투자에 힘입어 공업은 다른 부문의 산업보다도 빠른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문구업계의 경우 휴전과 함께 기존업체들이 피해 시설을 복구해 의욕적으로 생산을 재개하고, 거기에 신규업체가 참여함으로써 이른바 이원적인 형태의 회복세를 보였다. 따라서 실제 1950년대의 문구공업은 6・25 동란 이후부터 본격화됐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수복된 서울은 마치 전쟁의 참담한 피해를 복구할 엄두도 못 내고 있을 무렵이어서 많은 업체들이 부산에서 출발했다.05)

    국화산업이 위치했던 을지로 일대(1950년대)

    임시수도 부산은 행정뿐만 아니라 물산과 재화의 집산지인 경제의 중심지였고 국제무역항이었다. 그는 폐허화된 서울에서 전국을 상대로 하기보다는 경제의 중심지로, 국제무역항으로 유명해진 부산이 모든 면에서 유리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이미 무역업을 시작할 구상을 마친 뒤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고 전선에서 포성이 멈췄다. 정전협정이 체결 되자 남한과 북한은 준 전시상태로서 기나긴 휴전에 돌입했다. 전쟁은 그쳤지만 최화식 창업주는 처남 박희봉과 함께 문방구 일을 돌보느라 부산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서울로 돌아온 때는 휴전이 된 뒤로 1년이 더 지나서였다.

    1954년 5월, 최화식 창업주는 일광상회 이종선 사장과 공동투자로 국화산업(國華産業) 주식회사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했다. 국화산업은 주로 일본에서 지류, 문방구류 약품 등을 수입했는데 대일무역 역조가 심화되어 일본에서 수입을 규제하자 수입선을 홍콩, 스웨덴 등으로 다변화했다. (최화식 창업주가 해외 출장을 자주 나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이때 수입한 품목으로는 신문용지, 백상지, 마닐라판지 등의 비중이 컸으며 비누원료인 우지(牛脂)도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신문용지, 백장지 등을 스웨덴에서 직수입해서 지류도매상에 넘기기도 했다. 주요 임원진으로는 사장 최화식을 비롯해 부사장 김종선, 전무이사 최태묵, 상무이사 김서원이 포진했다.

    최화식 창업주는 문방구 도매상인 덕문상사를 정리하고 무역업인 국화산업에만 전념했다. 문방구점을 꾸려 가기 위해 부산에 그대로 남아 있던 박희봉도 서울로 올라와 합류했다. 1921년생으로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한 박희봉은 1946년 서대문 세무서를 시작으로 줄곧 세무소 간세과에서 근무하던 인재였다. 박희봉은 1963년 5월 한국특수제지 업무부장으로 입사했으며, 1966년 3월에는 대한팔프 설립과 함께 총무부장으로 입사해 최화식 창업주를 보필했다.

    ‘나라의 위엄과 권위를 떨치고, 빛나는 나라를 세우겠다’는 뜻에서 상호를 작명한 ‘국화산업’은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2가 현 외환은행 옆 2층 건물을 자체 사옥으로 장만할 정도로 크게 번창했다. 해마다 창립 기념일에는 당시 서울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반도호텔이나 조선호텔에 회사 직원을 모두 초대해 즐거운 회식을 갖도록 배려했다. 건물 1층에는 국화산업이, 2층에는 한국포장산업주식회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최화식 창업주는 국화산업을 통해 지류를 수입, 판매하면서 점차 기업 자산을 늘렸고, 이를 기반으로 오랜 꿈인 제지산업계 진출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05) 문구삼십년사, 한국문구공업협동조합(1992, p.122~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