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화식 창업주의 삶과 꿈

사업보국의 뜻을 세우고 사람의 가치를 쌓다

  • 1. 종이와 인연을 맺고, 정진하다

    최화식 창업주는 화신백화점 문방구부에서 가장 나이 어린 점원으로 종이와 종이제품을 취급하면서 종이와 인연을 맺었다. 종이를 통해 한 나라의 문화 척도를 가늠하고 한 사회의 부와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우쳤다.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의 제지업계를 이끌어갈 폭넓은 소양을 쌓고 안목을 기르는 가운데 제지사업을 이끌어나갈 거목이 싹을 틔우기 시작한 것이다.

  • 01. 1919년, 전주 최씨로 태어나다

    깨끗한나라는 1966년 3월 7일 대한팔프공업주식회사의 설립과 함께 55년 기업사의 첫 장을 열었다. 이날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한 최화식 창업주에게는 제지업계 진출이 일생의 숙원이었고, 마침내 그 꿈을 펼쳐나갈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었다.

    최화식 창업주는 1919년 경기도 화성에서 오랫동안 영농생활을 해온 최씨 집안에서 여러 형제 가운데 막내로 태어나,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것이 없었다.
    전주 최씨(全州 崔氏)는 전라북도 전주를 본관으로, 시조를 달리하는 4계파로 나뉘는데 서로 연원과 조상이 다르다. 최화식 창업주는 전주 최씨 중 가장 번성한 계파인 문열공계(文烈公系) 26세로 고려 문종 때 인물인 최순작(崔純爵)을 시조로, 27세와 28세의 항렬자는 ‘병(炳)’과 ‘규(奎)’를 사용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모두 109명의 문과 급제자를 낸 전주 최씨 가운데 정승과 대제학, 청백리, 배향공신이 모두 문열공계에서 나왔다. 최순작은 신라 말기와 후삼국시대에 문신으로 이름을 떨쳤던 3최(三崔), 즉 세 명의 최씨(신라 최치원, 후백제 최승우, 고려 최언위)로 불리던 최언위(崔彦撝)의 후예다.

    대한민국에서 1910년대에 출생한 세대는 일제강점기에 나고 자라며 20대의 대부분을 보냈다. 광복 이후 특히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는 급변하는 한국의 정치, 경제 상황에서 당시 기성세대로서 산업화 세대를 진두지휘하며 기반을 닦은 원로세대이다. 어린 시절부터 20대에는 일제강점기를, 30대에는 광복을, 40대에는 6・25 전쟁을 겪으며 대한민국 현대사의 굴곡을 헤쳐온 세대였다. 한국 경제계의 거물인 호암 이병철(1910~1987)과 아산 정주영(1915~2001)을 비롯한 대기업 창업주 1세대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 연대에 출생했다.

  • 02. 서울 수송공립보통학교를 마치다

    최화식 창업주는 소년 시절부터 매우 불우한 환경 속에서 외롭고 고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걸음마를 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2세 때에 관리 생활을 하던 선친이 작고 하면서 시작된 고된 시련은 1920년대의 어린 시절 내내 계속됐다.

    최화식 창업주의 모친은 한국 여성의 전형으로 자애로움과 희생적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은 분이었다. 어떻게든 어린 아들을 훌륭히 키워야겠다는 일념으로 서울로 이사를 결정하고, 어린 최화식에게 용기와 의욕이 솟아나도록 북돋워 주었다.

    일제의 일본 위주 식량정책과 지주제도로 인해 흔들리던 당시 농촌사회에서 한국인이 교육받을 기회는 극히 드물었다. 교육 기회의 확장은 철저하게 일제가 통제 가능한 수준과 범위에서만 이루어지던 때였으나 최화식 창업주는 서울 종로구 수송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1922년 현재의 서울 종로구청 자리(종로구 수송동 146-2)에서 개교한 학교였다.

    이 시기 전국적으로 수많은 보통학교가 설립됐으나 초등교육이 보편화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1919년부터 ‘3면 1교제’가 실시되다가 초등교육 확대를 위해 ‘1면 1교(1面 1校)’제를 실시한 것은 1929년이 되어서였다. 그 때문에 전례 없던 보통학교 입학시험이 생긴 것도 이때였다. 모든 면(面) 단위마다 보통학교 1개교가 생긴다해도 면 지역 전체의 교육을 관할할 수 없었다는 의미였고, 애당초 1면 1교 정책이 제대로 실현되지도 않았다. 6년제마저 정착되지 않아서 대부분 4년을 다녔고, 5, 6학년은 아예 개설되지 않은 학교가 태반이었다. 최화식 창업주는 모친의 적극적인 격려속에 14세에 서울수송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정형편으로 더 이상은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어려웠다. 실질적으로 1920년대 말 보통학교의 취학생 비율은 18%에 불과했다. 더구나 중등학교의 설립은 극단적으로 억제되어 있었다. 2개 도(道)마다 남자·여자 중등학교가 1개교씩이라도 설립되어 있으면 그나마 나은 형편으로, 1개 도 내에 중등학교가 아예 없는 시기도 있었다. 중등교육이 이러니 고등교육 기관은 말할 나위도 없는 실정이었다. 최화식 창업주는 학교가 아니라 일자리를 찾아 나서야 했다.

  • 03. 화신백화점 문방구부 소년 최화식, 종이와 인연을 맺고 정진하다

    최화식은 수송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즉시 화신백화점 문방구부에 직장을 얻고, 이때부터 집안 생계를 조금씩 돕기 시작했다. 화신백화점은 서울시 종로의 종각 네거리, 현재의 종로타워빌딩 자리에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박흥식(1903)이 한국 자본으로 근대식 건물로 지은 최초의 근대식 백화점이자 유일한 백화점이었다.

    박흥식은 16세부터 자전거를 몰며 평안도 용강에서 쌀 장사와 인쇄소, 문방구 장사를 하던 지방 상인 출신이었다. 1926년, 스물셋의 나이로 서울로 올라와 을지로 2가에 ‘선일지물(鮮一紙物)주식회사’를 설립한다. 그 무렵 신문관·박문국이 생겨나면서 활자로 인쇄, 책을 보급하게 되고 또 신교육이 늘어나 연필이나 만년필 같은 서양식 필기도구가 등장하면서 종이는 어쩔 수 없이 서양 종이를 수입해 써야만 하는 시대가 됐다. 전통 한지는 책이나 신문 등을 만드는 데는 적합하지 않았다. 증권과 지폐 발행이 늘어나고, 총독부의 토지조사로 수백만 장의 지적도와 토지대장이 만들어졌다. 전국에 1면 1교 정책이 실현되어 학생 수가 엄청나게 불어났으며 교과서 수요도 급등했다. 선일지물 개업 무렵 서울의 양지 소비량은 적어도 200만 원이 넘는 황금시장이었다. 선일지물은 겨우 1년 남짓 만에 서울 장안의 종이소매업자 20% 이상을 장악했다. 연말이 가까운 11월이 되면 박흥식은 창고 안에 종이를 산더미처럼 쌓아두는 재고를 자랑하며 이듬해 봄 새학기가 될 때까지 신나게 팔았다. 1931년 5월 박흥식은 화신상회를 인수했다. 박흥식이 화신상회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거대한 백화점 출현의 서막을 올리자 종로 상계, 아니 조선 전체 상계에 큰 충격과 화제를 몰고 왔다. 사람들은 자그마치 100만 원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자본 규모에 놀랐다. 1930년대 서울 인구의 80%가 단골이라고 할 만큼 화신은 조선인 경제의 상징이다시피 했다. 그 즈음 박흥식은 몰라도 화신을 모르는 조선 사람은 없었다.01)

    1935년 화재로 백화점 건물 2동이 완전히 소실된 뒤에 다시 지은 연건평 2,000평이넘는 지하 1층, 지상 6층의 신관은 당시 경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으니, 그런 곳에 취직한 것만 해도 커다란 운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종로는 조선시대부터 육의전을 중심으로 길가에 시전 행랑들이 늘어선 상업의 중심지였다. 영민하고 사교성이 좋은 최화식은 어린 나이에도 종로 상권의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시장의 실물경제를 눈여겨보며 지낼 수 있었다.

    최화식 창업주는 화신백화점에서도 가장 나이 어린 점원으로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과 어여쁨을 받았다. 게다가 타고난 근면성실이 바탕이 되어 문방구부 점원생활을 통해서 상거래와 관련한 질서와 도의를 익혀 나갔다.

    그런 중에도 다른 일에 손을 댈 수 있는 겨를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놓치지 않고 학업에 몰두했다. 훗날의 비상을 꿈꾸며 진학하지 못한 중학교 과정을 독학한 것이다.
    말 그대로 주경야독의 혹독한 시절이었고, 모든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기 위해 진력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어린 최화식에게는 그보다 더 큰 보람, 일생의 향방을 좌우하게 될 더 큰 가치관이 하나 싹트고 있었다. 문방구부에서 종이와 종이제품을 취급하면서 종이와 인연을 맺게 된 일이었다. 당시로서는 스스로 알 길이 없었겠지만 종이를 통해 한 나라의 문화 척도를 가늠하고 한 사회의 부와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우쳤을 것이다.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의 제지업계를 이끌어갈 폭넓은 소양을 쌓고 안목을 기르는 가운데, 마침내 제지사업을 경영하게 될 거목이 싹을 틔우기 시작한 것이다.

    최화식 창업주가 종이와 인연을 맺은 화신백화점(1930년대 후반)

    1) 고정일, 조선 최대 백화점 ‘화신’ 총수 박흥식, 주간조선, 2354호, 2015.4.27

  • 04. 학업을 위해 현해탄을 건너다

    최화식 창업주는 일찍 아버지를 여읜 채 홀로 있는 어머니와 의지하며 외롭고 고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18세가 됐을 때 뜻밖의 비운이 찾아왔다. 그동안 세파에 흔들릴 때마다 바람막이가 되어주었던 모친께서 더 이상 막내아들의 성장을 지켜주지 못하고 작고하신 것이다. 최화식 창업주의 심정은 애통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슬픔 속에 잠겼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슬퍼하고 가슴 아픈 채 지낼 수만은 없었다. 어쨌든 혼자만의 힘으로라도 집안을 일으킬 수 있어야 했다. 그런 결심을 굳힌 최화식이 택한 길은 학업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그동안 채우지 못한 배움에 대한 갈증을 찾아 현해탄을 건넜다. 그 길이야말로 작고하신 부모님에 대한 효도요, 자식된 도리라 여겼다. 정릉으로 출가한 누님댁에서 지내던 최화식은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최화식에게 동경은 의지할 곳이 전혀 없는 낯선 땅이었다. 당장 생계를 이어갈 방편도 학비를 마련할 길도 없었다. 당시 조선과 일본의 교육시스템은 격차가 컸다. 때문에 일본의 대학이나 고등전문학교에 유학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중학교에 다시 입학해야 했다. 다행히 화신백화점 시절 독학으로 쌓은 학력을 인정받은 최화식 소년은 동경의 다이세이(대성(大成))중학교 제4학년에 편입하게 됐다. 1948년 북한 부총리에 선출된 벽초 홍명희와 춘원 이광수가 다닌 학교였다.

    최화식은 수중에 여축한 생활비가 있을 턱이 없었으므로 한 달 넘게 간장 하나를 찬으로 삼아 겨우겨우 끼니를 이어가는 일이 허다했다. 그런 생활이 한 달이 넘어가자 간장독이 퍼지는지 얼굴이 파래질 정도였다. 버티기 힘들 정도였지만 그래도 참고 견뎠다. 그렇게까지 공부를 해야 할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공부할 시간이 부족해서 신문 배달을 나가면 길목마다 세워진 전신주에 영어 단어를 써놓고 오고 가는 길에 외웠다. 다 외우면 지우고 또다시 새 단어를 쓰고는 했다.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운 시기였던 터라 잘 곳조차 마땅치 않았다. 공원 벤치에서 잠자리를 청하기 일쑤였고, 신문 배달로 학비를 벌어 학업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 05. 1943년, 동경전수대학 상과를 졸업하다

    최화식 창업주가 수학한 센슈대학(전수대학, 專修大學, Senshu University)은 일본의 5대 법률학교02) 가운데 하나였다. 일본의 입법・사법・행정부가 집결한 도쿄 중앙의 심장부에 해당 하는 지요다구(千代田区)에 위치해 있었다. 본래 이름은 ‘천 세대의 밭’을 의미하며, 에도 성의 다른 이름인 ‘지요다 성’에서 따온 것으로, 구의 중심 지역에는 천황이 거주하는 고쿄(황거, 皇居)가 자리 잡고 있었다.

    미국에서 수학한 4인의 일본인 유학생이 중심이 돼 일본 젊은이들에게 경제와 법률을 가르치기 위해 메이지 시대인 1880년 센슈학교를 설립했다. 일본에서 경제학과 법학을 자국어로 배울 수 있는 고등 교육기관의 탄생이었다. 센슈대학의 전신이었던 이 학교는 51명의 첫 입학생으로 시작해 1885년에는 늘어나는 입학생에 대응하기 위해 현재의 지요다구에 해당하는 간다구 이마가와 골목(神田区 今川小路)에 캠퍼스를 신축, 지금의 간다캠퍼스로 이전했다.

    당시 센슈학교는 일본에서 최초로 경제학과를 개설한 경제 전문학교였고, 사학으로서는 처음으로 법률과를 연 사립 법률 전문학교였다. 설립 당시인 1880년대만 해도 일본에서 법률학을 가르치는 전문학교는 도쿄대학 법학부와 법무부의 법학교 2개에 불과해 각각 영어와 불어로 교수했던 반면 센슈학교는 일본어로 교수하는 획기적인 수업을 실시했다.03)

    1903년 학내 조직과 설비가 정비됨에 따라 처음으로 교명을 사립 센슈대학(私立 專修大學)으로 개칭했다. 현재는 상학부(마케팅학과・회계학과)로 분류되는 상과(商科)를 1905년에 창설했으며, 동시대의 다른 대학과 함께 상학의 선구자로서 일본의 교육・연구를 이끌다가 1919년에 이름을 센슈대학으로 바꾸었다. 최화식 창업주가 졸업한 상과는 현재의 마케팅학과로, 사회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인재 및 조직의 리더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주경야독을 멈추지 않는 동경의 외로운 고학생(苦學生) 최화식은 1943년 9월, 마침내 센슈대학 상과를 졸업한다. 마침 이 무렵, 1941년에 발발한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1943년 10월부터 문과계 고등교육기관에 재학 중인 20세 이상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징병 유예의 특권을 폐지했다. 이로 인해 많은 대학생들이 전쟁터로 향해야 했다. 한 달 전에 대학을 졸업한 최화식으로서는 커다란 화가 될 수도 있었을 일이 용케 비켜간 셈이었으니 과연 하늘의 뜻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최화식 창업주가 다녔던 1940년대 일본 동경전수대학

    2) 도쿄법학교(현 호세이대학), 메이지법률학교(현 메이지대학), 센슈학교(현 센슈대학), 도쿄전문학교(현 와세다대학), 이기리스법률학교(현 주오대학)

    3) 日本初の経済専門学校 1880(明治13)年 9月に 開校した専修学校は日本最初の経済専門学校であり、私立法律専門学校であった。この当時法律学を教える専門学校は、東京大学の法学部と司法省の法学校の2 つにすぎず、それぞれ英語·仏語で教授していたのに対し、わが専修学校は、邦語で教授するという画期的な授業を行った。https://www.senshu-u.ac.jp/history/

  • 06. 미쿠니석탄공업주식회사 취업, 그리고 귀국

    미쿠니(삼국, 三國)석탄공업주식회사는 1935년에 설립되어 석탄을 원료로 하는 가공연료 제품(연탄)을 생산, 도심지의 연료난을 해소하는 회사로 중국 등지에 석탄과 석유를 수출하는 회사였다. 최화식 창업주는 센슈대학을 졸업한 즉시 미쿠니석탄공업주식회사 영업부에 취직해 귀국할 수 있게 됐다.

    미쿠니석탄은 1934년 6월에 석탄 등의 연료 금속 제광물의 판매 및 부동산 관련 사업을 목적으로 경성부 남대문통에 삼국상회(三國商會)를 열고, 이듬해 현재의 서울지방경찰청 자리에 조선 주재 일본인 직원들을 위한 주거용 관사를 건립했다. 조선 최초의 아파트로 유명한 내자호텔이 그것으로, 광복 후에는 주한미군 숙소로 사용되다가 6・25전쟁 때는 종군 외신기자클럽이 들어서 세계적인 뉴스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경성의 삼국석탄은 광복 후 불하되어 대성그룹의 모태가 됐다. 삼국석탄공사 제1공장 부지가 바로 1959년 출범한 대성연탄주식회사의 왕십리 연탄공장 부지였다.

    최화식 창업주는 일본에 별다른 연고와 후견자가 없었다. 취업이 됐다고는 해도 한시름 놓았을 따름이지, 어려운 생활이 가신 것은 아니었다. 마침 미쿠니석탄 서울출장소에 배속되자 그는 비로소 귀국길에 올랐다. 최화식 창업주는 대학을 졸업한 고학력자로서 미쿠니석탄공업주식회사에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한동안 기업활동의 실제를 현장에서 체득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얻었다.

  • 07. 1944년 혼례를 올리다

    1945년 마침내 찾아온 8・15 광복과 함께 일본은 그들이 36년 동안 조선 땅에 건설해놓은 수풍댐, 철도, 도로, 항만, 전기, 광공업, 제조업 등 여러 분야에서 운영하던 기업과 개인 재산 모두를 그대로 두고 조선 땅에서 몸만 빠져나갔다.

    일본 제국주의의 오랜 핍박에서 해방된 조국은 최화식에게 무한한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이국땅에서 멸시와 차별대우 속에서 학업에 매진했던 그는 미력이나마 조국의 발전에 헌신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자각했다.

    정릉에 있는 누님댁으로 돌아와 새로운 직장을 알아보던 최화식 창업주는 어느 날 누님 댁 근처에서 평생의 동반자인 이정숙 여사를 우연히 보게 됐다. 키가 크고 날씬한 미인이었다. 첫눈에 반한 그는 누님께 부탁해 수소문한 끝에 그 처자가 정릉에 있는 유치원 선생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또 종로 효제동에 사는 것도 알게 되어 청혼을 넣기에 이르렀다. 1945년, 최화식 창업주는 평생의 동반자인 이정숙 여사와 혼례를 올렸다.04) 이정숙 여사의 부친인 이익현 어른은 해방 전에 작고하신 분으로 교과서판매주식회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50대에 퇴임하신 뒤로 동대문구에 속한 학교의 교과서 판매권을 인수받아 종로5가에서 교과서와 함께 학용품을 판매하는 문방구를 열었다. 사업은 한동안 잘 됐으나 빙부가 작고하자 퇴직하면서 인수했던 교과서 판매권도 양도된 뒤였다.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문방구점은 점점 손님을 잃고 오늘내일 문을 닫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러던 차에 뜻밖에 청혼이 들어온 것이다. 이정숙 여사의 어머님은 청혼한 신랑이 부모님도 안 계시고 직장도 없고 돈도 없다지만 일본에서 공부하고 온 청년이라는 사실에 희망을 걸고 결혼을 승낙했다.

    형편이 어려운 신랑 쪽에서 결혼 예물로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단념한 상태였는데 식을 올리기 전날 함이 들어왔다. 그래도 함을 보낼 형편은 되는 모양이니 다행으로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그 함을 열고 예물을 꺼내 보니 당시 제일 값싼 옷감 한 벌이 들어있을 뿐이었다. 빙모 되는 분의 억장이 무너질 듯한데, 그나마 함마저도 빌린 것이라며 도로 가져가니, 딸을 잘못 시집보내는 것 같아 밤새도록 마음이 무거웠다고 한다.

    최화식 창업주와 이정숙 여사의 결혼(1944)

    4) “이모와 이모부(최화식 창업주)가 결혼하신 지 5년 후, 1950년 6·25 전쟁이 났다.”(이한나, 『지나온 길 돌아보니 모든 것이 은혜여라』, 쿰란출판사, 2016, p.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