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민 회장의 일과 뜻

과거를 읽고 미래를 말하다

  • 일을 세우고 뜻을 나누다

    최병민 회장은 1978년 입사해 1983년 대표이사로 취임한 이래 남들이 판단을 망설이고 있을 때 한발 앞서 결정하고 미리미리 준비했다. 대한팔프는 최화식 창업주가 닦아 놓은 안정성장의 토대 위에서 파죽지세로 외형을 확대해 갔다. 화장지 사업에 뛰어들어 생활용품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하는 가운데 1987년 청주공장을 준공했다. 1991년 대한펄프로 회사명을 변경하고, 1997년 화장지 브랜드 ‘깨끗한나라’를 론칭하며 21세기로 향하는 글로벌 기업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달라져야 했고, 모든 것을 바꾸기 시작했다.

  • 대한팔프에 입사하다

    1978년, 미국에서 MBA를 마치고 귀국한 최병민 회장은 그해 11월 발족한 기획조정실의 실장으로 근무하면서 최화식 창업주를 가까이에서 모시게 됐다. 경영 일선에서 뵈었을 때의 모습은 이전까지 보셨던 아버지와 여러모로 달랐다.

    미국에 머물던 1977년 대한팔프는 신양제지를 인수하며 사세를 확장하고, 국내 최초로 컵 원지를 생산하고 있었다. 1980년을 전후해 커피 등 자동판매기의 보급이 크게 늘어나면서 컵 원지의 수요가 크게 늘어났다. 이에 따라 당시 시설을 풀가동하는 한편 장기공급 계획의 일환으로 라미네이트 코팅 시설 등 새로운 시설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어린 시절부터 매사를 미리 준비하던 태도는 대한팔프에 입사한 뒤로도 계속됐고, 기업을 경영하면서도 변함이 없었다. 최고경영자가 된 이후에도 미리 자료를 살펴보고 회의에 참석하는 습관을 유지했다. 핵심을 파악할 수 있는 간결한 회의 진행이 가능하고, 능동적인 참여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가부간 결론을 빨리 낼 수 있다는 장점이 회사 생활에 커다란 도움이 됐다. 어린 시절부터 길러진 습관의 힘이었다.

    가령 제지업계에서 설비 투자를 망설이며 업체 간에 어림짐작으로 탐색만 하고 있을 때도, 먼저 기계를 들여와 미리 준비한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는 했다. 그런 판단이 섰을 때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 ‘바로 지금이 적기’라는 말을 해주면 그처럼 크게 힘이 되는 일이 없었다.

    비록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IMF 외환위기를 만나 한동안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당시 들여온 청주공장 제지 3호기는 지금도 깨끗한나라가 지닌 가장 경쟁력 있는 기계로 제값을 톡톡히 하고 있다. 최병민 회장은 지금도 ‘CEO는 남들이 판단을 망설이고 있을 때 한발 앞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결정은 미리미리 사전에 준비한 결과로 나올 때 본래의 근본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특히 제지업은 생산수단으로서 설치 비용이 막대한 각종 대규모 장치를 설치해야 일정한 상태로 계속해서 변동 없이 생산할 수 있는 장치산업이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게 평가받는 대목이다.

    Mecdcarryboard와의 계약에 서명하는 최병민 회장(1982. 7. 16)

  • 경제사절단 최연소 경영인으로 대통령을 수행하다

    중남미가 지닌 풍부한 자연자원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하나가 바로 나무다. 중남미를 비롯해 대부분의 외국 제지회사는 산에 나무를 심어서 그 나무가 자라면 그대로 베어 종이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원료 펄프를 사다가 종이를 만들어서 팔 수밖에 없다. 경쟁력 측면에서 당연히 뒤처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한국 제지산업이 세계시장에 수출하는 등 발군의 성적을 낸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제지업계는 살아서 움직이는 제지산업의 진면목을 과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북남미 대륙과 유럽, 러시아 제지산업이 발달한 것도 나무가 많아서이고, 인도네시아 제지산업이 발달한 것도 나무가 많아서 그렇다.

    생산규모와 자급률에서 산림대국인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스웨덴과 핀란드 등은 펄프 제조업과 종이 제조업이 함께 발달해 있었다. 북유럽과 북아메리카 등 펄프 용재가 풍부한 국가에서는 펄프 공정과 제지 공정이 수직적으로 통합된 일관생산 방식이 일반적이었고, 이는 제재(製材)산업이나 펄프 생산업체에 의한 통합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았다. 한편 칠레나 브라질과 같이 펄프 자급률이 높은 국가들은 펄프 제조업 위주로 산업이 발전하고 있었다. 나무를 베어 펄프를 만들고 그 펄프로 종이를 생산하는 국가들에게, 펄프를 수입하는 국가이면서도 오히려 종이를 수출하는 한국은 세계 제지업계에서 단연 이채로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1996년, 최병민 회장은 당시 김영삼 대통령을 수행한 최연소 경영인으로 중남미 5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사실 최병민 회장은 대학 시절부터 김영삼 대통령과 서로 얼굴을 알 만한 친분이 있었다. 운동을 좋아하던 최병민 회장이 남산의 한 체육관에서 자주 수영을 하고는 했는데 어느 날 우연히 재야시절의 김영삼 당시 야당 국회의원을 만난 것이다. 수영을 하다가 우연히 얼굴이 마주쳐 인사를 드리고 외교학과 학생이라고 소개하자 동문이라며 반갑게 대해준 것이었다.

    경제사절단으로 동행한 기업 가운데 대한펄프의 회사 규모가 가장 작았고, 또 최병민 회장은 가장 젊은 기업인이었다. 대통령에게 인사를 드리자 놀랍게도 대학 시절의 최병민 회장을 기억하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는 일부러 오라고 해 등을 두드리며 격려를 해주었는데 그걸 본 다른 사람들이 불필요한 오해를 하기도 했다.

    중남미의 펄프 회사들은 그 규모부터가 워낙 컸다. 각 업체의 내로라는 회장님들에게 인사를 드리면서 대한펄프의 기업 이미지도 격상됐다. 그런데 경제사절단에 동행한 다른 기업의 회장님은 모두 2~3명씩 비서가 동행했으나 최병민 회장만 단신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홀로 여행 가방을 꾸리느라 간혹 늦게 이동 차량에 오르는 경우가 있었다. 당시 한국무역협회 회장으로 재임 중이던 전 LG칼텍스가스 구평회(具平會, 1926-2012) 회장이 비서실에 일러 최병민 회장의 짐을 챙기도록 하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한 그는 학과 후배라며 특별히 최병민 회장을 아꼈다.

    최병민 회장은 1998년에도 김대중 대통령의 중국방문에 맞춰 파견된 경제사절단의 일원으로도 참여했다. 마침 대한펄프 제품이 중국으로 대량 수출되면서 꾸준히 중국 시장을 개척하고 있던 때여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중국이 새로운 수출시장으로 부상하고 국가 간 경제적 보완성과 장래의 잠재력이 컸던 만큼 최병민 회장은 중국 방문 기간 북경 및 상해의 수출시장을 둘러보고 대한펄프 제품의 중국 시장점유율을 더욱 확고히 다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최병민 회장은 대한팔프에 입사하고 1980년대 들어 중국어가 가능한 인력을 채용하기 시작했었다. 그들과 함께 중국과 홍콩을 수없이 방문했다. 무역상사를 능가하는 발걸음에 대기업에서도 감탄할 정도였다. 1988년에는 대한팔프USA를 설립하는 등 세계 시장 곳곳을 상대로 발품을 판 끝에 홍콩(1991), 상하이(1994), 베이징(1997), 광저우(1998)에 차례로 현지사무소를 개설하며 해외거점을 마련했다.

  • ‘VISION 21’ 프로젝트 선포

    대한펄프는 그동안 제지업 외길을 달려왔기 때문에 어려울 때 도와줄 계열사가 없다는 취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최병민 회장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적극적인 사업다각화를 전개해 1996년 청주 민방 컨소시엄에 참여한 것을 비롯 의정부, 동두천지역의 케이블TV 운영권자로 선정되는 등 방송사업에도 진출했다. 1997년 5월에는 공보처가 발표한 2차 CATV 종합유선방송국(SO) 사업자 선정에서 ㈜한국케이블TV 다우방송 의정부지역 사업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처럼 산업이 다변화, 집중화되는 경제환경에서 정보통신과 멀티미디어를 통한 사업다각화를 전개하는 중에도 최병민 회장은 대한펄프의 주력 사업이 어디까지나 제지업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21세기를 앞두고 문화 수준이 높아질수록 종이의 수요가 더욱 늘어나게 마련이므로 제지업종에 전념하는 한편 새로운활로를 모색해나갔다.

    이를 위해 1997년 3월 창립 31주년을 맞아 ‘VISION 21’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실행단계로 2000년까지 2,500억 원의 설비 투자를 통해 매출 규모 6,000억 원의 종합제지업체로 성장한다는 목표를 확정했다. 최종 목표는 세계 제지시장을 선도하는 종합제지업체로 발돋움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시급한 것이 글로벌화였다. 중국 공장에 이어 남미에 화장지공장 설립을 추진하고, 이들 사업이 매듭지어지면 브라질, 베네수엘라, 인도네시아 등에서 해외조림은 물론 펄프가공 분야에도 진출한다는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시장개방으로 어려워진 국내 경영 여건을 극복하고 해외 진출에 성공하느냐에 따라 대한펄프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본 것이다. 「VISION 21」 프로젝트와 함께 공익성 캠페인을 입안해 깨끗한 환경 만들기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창립 30주년 기념식에서 인사말을 건네는 최병민 회장

  • 사업영역의 확대, 성장가도를 달리다

    대한팔프는 최화식 창업주가 닦아 놓은 안정성장의 토대 위에서 파죽지세로 외형을 확대해 갔다. 1985년 11월에 금강제지를 인수해 화장지 사업을 시작하고 기저귀, 생리대 등 생활위생용품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했다.
    1988년 청주공장을 준공하고, 미국에 첫 해외법인 ‘대한펄프USA’를 설립했다. 생리대 ‘라라센스’를 출시한 지 10년 만이었다. 1989년 제지연구소를 세웠고, 기저귀 ‘라라미미’를 출시했다. 1991년 대한펄프로 회사명을 변경하고 1994년 하반기부터 ‘좋은펄프 대한펄프’라는 슬로건을 로고처럼 사용하기도 했으며, 1997년 화장지 브랜드 ‘깨끗한나라’를 론칭했다.

    제지 중심이었던 포트폴리오에 변화가 생긴 것은 1987년 위생용지 생산에 돌입하면서부터였다. 1990년 충청북도 청주공장에 기저귀 생산설비 1호기와 생리대 1~3호기를 준공했다. 이후 10년여에 걸쳐 기저귀 설비는 4호기까지, 생리대는 5호기까지 증설해 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위생용지를 앞세워 안정적인 시장점유율을 확보하며 성장가도를 달렸다.

    1990년대 중반까지 2,000억 원이었던 매출은 1998년 3,000억 원대를 돌파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도 200억 원대에서 350억 원으로 늘며 12%의 이익률을 유지했다.

    2000년에는 매출 4,000억 원, 영업이익 400억 원 고지를 넘어섰다. 제지 부문이 전체 매출의 54%를, 위생용지 부문이 나머지 46%를 차지했다.

    1997년 화장지 브랜드 ‘깨끗한 나라’를 내놓은 대한펄프는 당시 대규모 신규 설비증설에 과감하게 투자했다. 소비자들의 취향 조사를 통해 ‘화장지에 원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인 ‘깨끗함’에 초점을 맞춰 새로운 브랜드 ‘깨끗한나라’를 개발하고, 콘셉트에 맞는 이미지를 제작해 마케팅 전 분야에 일관되게 적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 IMF 외환위기,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남긴 교훈

    최병민 회장은 하나의 원칙이 정해지고, 그 원칙이 옳다고 판단하면 양보하지 않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강하게 밀고 나간 결정의 모든 결과가 순조롭지는 않았다. 그런 점 때문에 오히려 실패하거나 손실을 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사안마다 개별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앞세워 따지기보다는 전체적으로 더 중요한 점이 무엇인가를 먼저 판단했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커다란 성공을 이끈 경우가 더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IMF 외환위기 직전에 제지 3호기 설비를 설치한 것이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IMF 외환위기로 인해 회사 경영 전체에 큰 영향을 받았지만 고비를 넘기고 나서 돌아보니 그때 과감하게 추진했던 것이 도움이 됐다. 최병민 회장은 그때 결단하지 않고 주저했다면 지금의 회사가 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무엇보다 업계 경쟁력 측면에서 단연 우위를 점하게 됐다. 하지만 성장을 거듭하던 대한펄프는 예상치 못한 IMF 외환위기를 맞아 심각한 경영난에 빠졌다. 공격적인 설비 증설이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다.

    심각한 위기였다. 자금 부담을 감당하지 못해 일부 공장을 정리하고 인력도 1,200명에서 500명으로 줄이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2000년대 들어서자 외환위기 여파는 더욱 심각해졌다. 수요가 줄어든 상황에서 제지업체들이 경쟁적으로 설비 증설에 나선 탓에 공급 과잉 상태가 벌어지고, 이로 인해 가격경쟁력이 악화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매출은 줄고 판매가격은 수익성을 압박하는 지경에 다다랐다. 여기에 펄프 가격 상승 등으로 원가부담이 가중되면서 수익성마저 악화됐다. 생활용품사업 부문도 수입 브랜드에 밀리면서 시장 지배력을 잃어갔다. 게다가 영업활동을 통한 현금 창출력이 현저히 떨어져 2003년 이후 소요자금을 차입금에 의존하면서 심각한 경영난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처럼 보였다.

  • 중국 제지업체의 저가 공세에 맞서다

    2003년 이후 소요자금을 차입금에 의존해야 할 정도로 악화된 회사 사정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같은 해 대규모 생산라인 증설에 나선 중국 제지업체의 저가 공세로 국내 제지업계가 중국 시장에서 설자리를 잃은 가운데 우리나라의 대중국 제지 수출에 비상이 걸렸다. 또한 2004년부터 중국산 제지의 수입 관세율을 무세(無稅)화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내수판매 타격도 예상됐다.

    2,000억 원을 투자해 최신 판지 설비를 증설하는 과정에서 외환위기 여파로 심각한 경영난을 겪게 된 대한펄프는 최병민 회장을 비롯한 대주주들이 회사를 살리기 위해 2001년 50억 원, 2003년 376억 원 등 사재를 출연해 증자에 참여하는 등 솔선수범을 보였다. 그러나 그 여파는 길게 이어졌다. 2003년 부채비율이 735%에 달했고 106억 원 적자를 기록했다. 이처럼 경영이 심각해지자 전문 경영인을 영입하는 등 피나는 노력으로 2004년과 2005년 연속 흑자경영으로 돌아서 경영정상화를 이뤘다.

    2004년에는 한솔제지, 신무림제지 등 중국에 진출해 있던 국내 메이저 제지업체들이 첸밍제지(晨鳴製紙) 등 중국 로컬기업의 저가 공세에 밀려 중국사무소 철수를 진행했다. 국내 제지업체들은 전략적 제휴, 중국 이외 지역의 수출다변화 정책 및 효율적인 생산관리시스템 도입을 통한 위기경영 체제에 돌입했다.

    깨끗한나라도 2003년 2월 홍콩사무소와 중국 광주사무소를 중국 심천사무소로 통폐합했다. 2004년 12월에는 베이징과 광저우사무소를 이미 폐쇄하고 상하이와 선전사무소만 남겨둔 상태였다.

    2004년부터 중국 로컬기업들의 급부상으로 제지(백판지) 수출에 타격을 받아 고전하게 되자 이에 대한펄프도 백판지 설비의 지종 변화 등 다각도의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매출액은 3,000억 원대로 감소했다. 2002년 414억 원이었던 영업이익이 2006년 57억 원으로 감소하더니 이듬해 18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매년 100억 원 이상의 대규모 적자를 기록하며 재무구조가 급격히 악화된 것이다. 2007년 198억 원의 순손실을 본 데 이어 2008년에도 294억 원가량의 순손실을 남겼다. 거듭된 실적 부진으로 대한펄프의 재무사정은 점점 악화됐다. 설상가상으로 2008년에는 미국의 금융시장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파급된 대규모의 금융위기 사태가 닥쳤다.

  • 최병민 회장의 수술과 복귀

    2006년 7월 대표이사 회장으로 선임된 최병민 회장은 깨끗한나라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청사진을 마련하는 한편, 2007년 한국제지공업연합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제지업계의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2008년 말 중환자실에 입원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면서 결국 간 이식수술을 받기에 이르렀다. 경영을 돌볼 수 없게 되자 회사의 앞길에 더욱 어두운 구름이 몰려오는 듯했다.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다행히 아들의 간을 이식받는 큰 수술을 받고 회복되어 병상에서 벗어나 회사로 복귀했다.

    2013년 1월에는 한국제지공업연합회 회장단 모임에서 차기 회장으로 추대됐다. 병으로 회장직을 내려놓았다가 두 번째 취임하게 된 한국제지공업연합회에는 신문용지 4사(대한제지, 전주페이퍼, 보워터코리아, 페이퍼코리아)와 한솔제지, 무림제지 등 인쇄용지업체와 세하, 한창 등 백판지업체 등 총 18개 중견・대기업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었다. 최병민 회장의 취임으로 제지업계 최초 부자(父子) 회장이 탄생했다. 고(故) 최화식 회장이 제11·12대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최병민 회장이 건강을 되찾아 회사로 돌아올 무렵 제지업계 현황은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었다. 깨끗한나라뿐만 아니라 제지업계 전체가 내수 부진에다 환율문제, 세계 경제위기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최병민 회장은 국내보다는 해외시장을, 국내에서의 가격 경쟁보다는 해외에서의 품질 경쟁에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를 위해 업계가 △동남아 등 새로운 시장 개척 △부단한 기술 개발을 통한 품질 향상 △에너지 비용 절감을 위한 시설투자 등에 나설 것을 제안했다.

    또한 일본이나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은 종이 공급이 포화상태였지만 인도네시아, 태국 등 개발도상국은 종이 소비가 꾸준히 늘고 있다면서 국내에서 출혈 경쟁하기보다는 해외시장을 더욱 적극적으로 개척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품질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신흥시장에서 선진국 제지기업들과 경쟁할 수 없다며 업계가 연구・개발(R&D) 투자를 늘려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특히 그는 폐지업계와의 공생관계 구축을 강조했는데 이는 제지업계의 지속성장을 위해서는 주원료인 폐지와 펄프의 안정적인 공급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생각에 기반한 판단이었다. 최병민 회장은 제지업계가 안정된 가격을 보장해주고, 폐지업계는 품질을 유지해 주면 상생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2020년 5월에는 한국제지자원진흥원 제4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한국제지자원진흥원은 제지자원(폐지)의 안정적인 수급과 선진화된 유통관리 시스템 도입을 위해 제지업계와 제지원료 업계, 정부가 공동으로 설립한 재단으로 현재 128개 제지・원료 기업이 회원사로 등록되어 있다. 이에 따라 최병민 회장은 폐지 품질관리 강화를 위한 ‘단체표준인증’ 취득 독려와 순환자원 사용 촉진을 위한 ‘순환자원인정제도’ 준수 장려를 주요 사업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한국제지연합회 제64차 정기총회에서 인사말을 건네는 최병민 회장(2015. 2. 27)

  • 백척간두에 서서 한 걸음 더 나아가다

    2008년 말에 대한펄프의 자본잠식비율은 37.3%(자본금 432억 원, 자본총계 271억 원)에 달하고, 부채비율은 1,496%까지 치솟았다. 부도를 피하기 위해서는 법정관리를 신청하거나 M&A를 진행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매출액은 지속적으로 증가했으나 적자가 누적되어 자본잠식 상태가 더욱 심화되고 이로 인해 감자 등 재무구조 개선 조치를 취했으나 역부족이었다.

    2009년 4월 대한펄프는 최대주주를 희성전자로 변경하고, 800억 원 규모 1600만 주에 이르는 유상증자를 단행했다. 뼈를 깎는 일련의 구조조정을 거친 후 희성전자의 대한펄프 지분율은 70.75%에 달했다. 재무 상황이 한결 나아졌다. 2008년 1,500%에 육박했던 부채비율이 2009년 말 328%까지 떨어졌고, 294억 원에 가까웠던 순손실액도 30억 원 규모로 축소됐다. 2010년에는 41억 원의 순이익을 기록하며 비로소 흑자로 전환했고, 이후 2011년 12억 원, 2012년 144억 원, 2013년 161억 원 등 잇따라 흑자를 기록하며 양호한 실적을 이어갔다.

    이에 멈추지 않고 포화상태인 백판지 사업 대신 ‘릴리안’(2011) 등 생리대 브랜드를 출시하며 위생용지 부문에 힘을 실었다. 대중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1020 타깃층의 고객 감성을 연결시켜 패키징 디자인에서도 우수한 반응을 얻는 데 성공했다.

    2012년 깨끗한나라는 비로소 매출 6,334억 원을 기록하며 본격적인 실적 개선을 이루었다. 2013년에는 대규모 유상증자와 전환사채 발행 등을 통해 재무구조를 개선했으며 여기에 더해 163억 원의 순이익을 기록하며 자본잠식에서 벗어나게 된다.

    2014년 상반기에만 3,000억 원이 넘는 매출을 달성해 역대 최고의 실적을 올렸다. 그동안 영업이익 역시 꾸준히 성장곡선을 긋기 시작했다.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 백 자나 되는 높은 장대 끝머리에 올라서 위태로움이 극도에 달했는데,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말이다. 절벽 끝에서 또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이미 할 수 있는 일을 다한 것인데, 또 한 걸음 나아가라는 말은 결국은 더 노력해 위로 향하라는 말이었다. 깨끗한나라는 백척간두 진일보로 21세기로 행하는 글로벌 기업의 문을 새로 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달라져야 했고, 모든 것을 바꾸기 시작했다.

  • ‘깨끗한나라’, 100년 기업의 가치를 확인하고 미래로 향하다

    · 화장지 브랜드의 등장과 사명 변경
    2011년 3월, 그동안 산업용지와 생활용품을 제조하면서 사용해온 사명 ‘대한펄프’를 ‘깨끗한나라’로 변경했다. 회사의 경영진은 앞으로 회사의 미래 성장동력은 ‘생활용품’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사명을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소비자 친화적인 생활용품을 만드는 기업으로 거듭나기에 ‘펄프’란 단어는 제지회사의 딱딱한 이미지가 강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사명 교체를 결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1966년 창립한 대한팔프는 기성세대에게 ‘대표 제지기업’으로 인지도를 쌓은 데다 창업주가 직접 만든 사명을 바꾼다는 부담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제 2도약’을 위해 경영진은 과감히 교체를 선택, 사명 사내 공모를 시작했다.

    3개월간 임직원의 의견을 모으자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것이 당시 화장지의 브랜드명인 ‘깨끗한나라’였다. 당시 히트 제품 브랜드인 ‘깨끗한나라’를 사명으로 쓰자는 의견이 많았다. ‘깨끗한나라’라는 단어가 다른 경쟁사의 제품 이름보다 쉽게 귀에 들어오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사명이 된 ‘깨끗한나라’를 브랜드명으로 선택한 것도 당시 대한펄프로서는 ‘일종의 모험’이었다. 1997년에 화장지 신제품을 내면서 수십 차례 소비자들의 취향을 조사한 결과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은 ‘깨끗함’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하지만 ‘영어식 브랜드가 익숙한 소비자에게 다섯 글자나 되는 순수 한글 브랜드가 성공할 수 있겠느냐’는 반대 의견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잘 나갔던 화장지 브랜드명은 ‘뽀삐’, ‘땡큐’ 등의 영어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깨끗한 경영’, ‘깨끗한 제품’이라는 기본 경영 방침을 소비자에게 전달한다는 뜻에서 ‘깨끗한나라’ 상표명을 선택했다. 또한 토종 기업인만큼 순우리말로 지은 상표명을 채택해 차별화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도 보태졌다. 이 같은 생각은 아기기저귀 브랜드 ‘보솜이’, 생리대 브랜드인 ‘순수한면’ 등에도 반영됐다.

    사명 변경은 긍정적 결과를 가져왔다. 지난 2011년 3월 대한펄프에서 깨끗한나라로 사명을 바꾼 뒤 생활용품 부문 성장세에 속도가 붙기 시작한 것이다. ‘깨끗한나라’인지도 덕에 2011년 국내 최초로 100% 순면 소재를 사용하며 순면 커버 시장을 공략한 생리대 브랜드인 ‘순수한면’과 함께, 역시 국내 최초로 구멍난 ATB 신소재를 활용한 ‘보솜이 베이비팬티’ 등 신제품을 잇따라 출시하면서 소비자의 선택을 받았다.

    깨끗한나라로의 사명변경을 공고한 광고

    · ‘KleanNara’에 담은 커뮤니케이션
    1997년 화장지 브랜드의 이름으로 등장한 ‘깨끗한나라’가 2011년 마침내 기업명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생산자에게 중요한 ‘펄프’보다, 소비자의 ‘깨끗한 생활, 깨끗한 환경’을 먼저 생각하겠다는 고객가치를 내세운 것이다. ‘깨끗하다’는 바르고 우수한 제품을 만들어 고객을 만족시킨다는 기업의 미션이자 소비자들에게 만족과 행복이 가득하길 원하는 기업의 바람이었다. 또한 정도경영과 사회공헌의 기업가치를 만들어내고, 새롭고 창의적인 사내문화를 이끌어내겠다는 변화의 의지를 담고 있었다.

    최병민 회장은 ‘자라나는 새싹’의 테마를 통해 미래의 희망과 현재의 역동적인 에너지를 동시에 담은 깨끗한나라의 CI를 통해 소비자들의 감성에 다가가기를 원했다.

    아울러 새로운 기업 명칭에 따르는 CI, 그리고 ‘깨끗한나라’라는 사명에 대한 영문사명의 개발이 주요 이슈로 떠오르자, ‘깨끗한나라’라는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한글사명에 국내외를 모두 고려한 고유의 느낌을 어떤 방식을 통해 최대한 전달할 것인지 다각도로 고민하는 과정을 거쳤다.

    최종적으로 Clean Nara에서 ‘C’를 ‘K’로 트위스트한 ‘KleanNara’를 영문사명으로 확정하게 된 것이다. 특히 영미권에서 Clean은 깨끗한 의미와 동시에 비즈니스 영역에서 청소 및 환경 관련 기업을 떠올리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라 Clean의 느낌은 유지하되 대한팔프의 창업 의의를 계승하고, 이를 Korea와 연계함으로써 추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K를 선택한 것이다. 아울러 비즈니스 측면에서 고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Clean & Natural Living’이라는 슬로건을 함께 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