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민 회장의 일과 뜻

과거를 읽고 미래를 말하다

  • 온유함으로 소통하고 원칙으로 신뢰를 얻다

    최병민 회장에게 ‘옳은 일은 옳은 일’이고, ‘그른 일은 그른 일’이다. 옳지 않은 일을 적당한 타협으로 해결하기 위해 망설이지 않았다. 현실 속에서 기업 활동은 끊임없이 서로 통하고 넘나드는 협의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곧은 성품은 오히려 손실을 보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원칙을 통해 소통하는 깨끗한나라의 사풍을 정착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최화식 창업주가 주창해온 경영이념인 ‘진실(眞實)’ 을 경영활동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가치체계로 끌어올려 기업 안팎에서 두터운 신뢰를 얻기에 이르렀다.

  • ‘송헌(松憲)’, 흔들리지 않는 의지와 휘거나 구부러지지 않는 마음

    최병민 회장의 성품은 ‘송헌(松憲)’이라는 호에 잘 드러나 있다. 오로지 하늘만을 바라보며 곧게 자라는 소나무, 여기에 남이 쉽게 부러뜨릴 수 없고 스스로 부러지지도 않는 원칙의 엄격함이 더해져 있다. 굳건하게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며 흔들림이 없는 태도, 세태에 따라 함부로 휘거나 부러지지 않는 의지가 담겨 있다.

    ‘송(松)’은 ‘소나무’나 ‘느슨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자는 (나무 목)자와 (공평할 공)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소나무에서 나는 솔잎 향은 정서적인 안정감을 주기 때문에, ‘’자에는 ‘여유가 있다’, ‘긴장이 풀리다’와 같은 긍정적인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헌(憲)’은 ‘법’이나 ‘가르침’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집 면)자와 (예쁠 봉)자, (눈 목)자, (마음 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해로운 일을 하지 못하도록 밝은 눈(目)과 마음(心)으로 감시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법(法)’을 뜻하기도 한다.

    송헌 최병민 회장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은 ‘대단히 온화하면서도 곧은 성품을 지닌 사람’으로 요약된다. 최병민 회장은 상대방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온화한 표정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그 온유함에 강단(剛斷) 있는 원칙을 동반한다. 굳세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는 힘, 어떤 일을 야무지게 결정하고 처리하는 힘을 의미하는 사전적인 정의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기억에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그러한 온유함과 원칙은 지난 1978년 대한팔프에 입사한 이래 40여 년간 깨끗한나라를 이끈 또 다른 저력이었다.

  • 온유와 원칙의 조화

    최병민 회장에게는 옳은 일은 옳은 일이고, 그른 일은 그른 일이다. 옳지 않은 일을 적당한 타협으로 해결하기 위해 망설이지 않았다.

    현실 속에서 기업 활동은 끊임없이 서로 통하고 넘나드는 협의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곧은 성품은 오히려 손실을 보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원칙을 통해 소통하는 깨끗한나라의 사풍을 정착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최화식 창업주가 주창해온 경영이념인 ‘진실(眞實)’을 경영활동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가치체계로 끌어올려 기업 안팎에서 두터운 신뢰를 얻기에 이르렀다.

    옳고 곧게 일을 처리하는 원칙주의는 서로 다른 방식을 고집하는 이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질 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궁극에는 옳은 방향성을 지향한 진심이 전달되기 마련이었다. 최병민 회장은 스스로 자신의 성품을 바꾸기 어려워 외로운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작은 이익을 위해 상대를 설득하지 않고, 어긋난 길을 걷지 않았다. 최화식 창업주로부터 물려받은 온유(溫柔)함을 바탕으로 소통하고, 강한 원칙을 추진력 삼아 어려운 고비를 이겨냈다.

    아울러 최병민 회장은 하나의 원칙이 정해지고, 그 원칙이 옳다고 판단하면 양보하지 않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강하게 밀고 나간 결정의 모든 결과가 순조롭지는 않았다. 그런 신념 때문에 오히려 실패하거나 손실을 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사안마다 개별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앞세워 따지기보다 전체적으로 더 중요한 점이 무엇인가를 먼저 판단했다. 그래서 오히려 커다란 성공으로 이끈 경우가 더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IMF 외환위기 직전에 청주공장 제지 3호기 설비를 설치한 것이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IMF 외환위기가 덮쳐 회사 경영 전체에 영향을 미쳤지만 고비를 넘기고 난 뒤에는 오히려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고 추진한 것이 도움이 됐다. 그때 결단하지 않고 주저했다면 지금의 회사가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무엇보다 업계 경쟁력 측면에서 단연 우위를 점하게 됐다.

  • 어린 시절부터 기른 습관의 힘

    최병민 회장은 1952년 3월 임시수도인 피난지 부산의 남부민동에서 태어났다. 한국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휴전 협정이 별다른 결실을 보지 못하던 시기였다. 3년에 걸친 기나긴 전쟁으로 인해 국토가 황폐화하고 경제상황도 초토화된 상태에서 태어난 1950년대 세대들은 비록 6・25전쟁의 폐허 속에서 태어났지만, 이 시기에 성인으로 성장한 당시 기성세대들(1910~30년대생)이 거는 기대가 특별히 컸다.

    서울 명륜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최병민 회장 또한 최화식 창업주의 각별한 아낌을 받으며 자랐다. 최병민 회장은 유독 자연 친화적이던 최화식 창업주가 집 안에 여러 새와 동물을 키우는 것을 좋아해 어린 시절부터 정서적인 안정과 자율성을 갖고 성장할 수 있었다. 1959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초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매우 활동적이어서 친구들과 어울려도 앞장서 리드해 가는 것을 좋아했다. 이러한 성향은 학교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가령 가만히 앉아 읽기만 하는 독서에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자발적으로 하는 예습에는 유달리 흥미를 느꼈다.

    내일 할 공부를 미리 하는 습관은 그에게 매사를 미리 준비하고 남보다 먼저 준비하는 성향을 길러주었다. 무엇을 배우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학교에 가면 졸음이 왔지만 미리 준비하면 매사에 적극적으로 바뀌는 자신을 경험할 수 있었고, 그러한 경험은 남다른 자신감과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최병민 회장은 중학교 입시에서 일찌감치 실패의 쓴맛을 보았다. 경기중학교 입시에 낙방한 것이다. 최화식 창업주의 격려와 함께 덕수초등학교로 학적을 옮겨 1년을 더 다녔다. 이 때문에 경기고에 먼저 입학한 친구들은 66회, 최병민 회장은 67회로 졸업하게 됐다.

    초등학교 시절의 최병민 회장(왼쪽부터 최병민, 최병욱, 최병준)

  • 경기고 야구부 주장 최병민

    일본에서 대학 시절을 보낸 최화식 창업주는 생전에 열렬한 야구팬이어서 야구와 관련한 기사를 읽기 위해 일본 잡지를 탐독하고는 했다. 그가 공부한 동경의 센슈 대학(專修大學) 야구부가 1931년부터 시작된 5개 대학 야구리그에서 6연패를 달성하는 등 훌륭한 성적을 거둔 전력이 있음을 상기하면 누구라도 충분히 그럴 법한 일이다.

    최병민 회장도 그 영향을 받아 운동을 매우 좋아했다. 경기고등학교 시절 학교를 대표하는 야구부 선수로 동대문구장에서 열리는 대회에도 여러 차례 참가했다. 스포츠에서 강조되는 기본 가치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윤리 규범을 구체적으로 적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스포츠에서 강조되는 기본 가치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는 도덕적 태도, 진실성, 자기 통제력, 자기 존중, 상대의 의견과 권리에 대한 고려, 공정성 등의 정신적 태도나 자세 등을 포괄한다. 스포츠는 경쟁성과 규칙성을 특징으로 갖지만 놀이와 경쟁의 두 관점이 조화될 때 본래 가치를 되살린다. 최병민 회장은 중・고교 시절에 야구 등 여러 운동을 통해 이러한 가치를 미리 예습할 기회를 얻었던 셈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성적으로 1등을 하기보다 친구들을 모아 함께 야구 경기를 하고, 리드하는 시간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즐겁지도 않았을 것이다.

    경기고에는 야구부 외에도 아이스하키부가 있었는데 규율이 엄했다. 최병민 회장의 스타일은 달랐다. 마음이 여린 탓인지 후배들에게 심부름을 시키거나 체벌을 가하거나 하는 그런 완력을 사용하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 청소까지 선배인 그가 솔선수범하고 나서 다른 운동부 주장들이 그렇게 하지 말라며 말리기조차 했다. 위계 질서를 해치는 단점이 전혀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최병민 회장은 자신의 스타일에 따라 후배들을 대했다.

    최병민 회장은 경기고등학교를 대표하는 야구부를 이끄는 주장 선수인 동시에 학업에도 충실한 학생으로서 자신감을 지니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자신을 사랑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존중받고, 스스로를 존경하면 다른 사람도 그를 존경할 것이라는 신념으로 안정과 행복을 찾았다.

    경기고등학교 졸업식(1971. 2)

  •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 입학하다

    최병민 회장은 1971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최병민 회장에게는 당시 외교관보다 더 멋진 직업이 없어 보였다. 국가를 위해서 해외에서 일하고, 인정받고, 외국인들과 만나 문제를 해결하는 당당한 모습을 미래상으로 그렸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는 1955년 신설된 정치학과 내 외교학전공으로 출발, 1959년 독립학과인 외교학과로 승격됐다. 외교학과는 외교관의 산실로서 기능하면서도 정치학과와 함께 학과 특성상 유달리 정치의식이 강한 인재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각 대학의 정치・외교학과는 1960년대부터 권위주의 정권에 대항하는 주요한 학과 중 하나로, 반탁 학생운동, 4・19혁명과 6・3한일회담반대운동 등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학생들이 많았다.

    특히 최병민 회장이 대학에 입학한 이듬해 1972년에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캠퍼스는 연일 데모로 조용한 날이 거의 없었다. 강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날이 많았다. 어느 날은 강의실에서 인사를 마치고 그것으로 끝이기도 했다.

    졸업 후에는 관계로 진출해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을 견인하거나 정계와 언론계에서 현대적인 민주정치 확립에 기여하는 등 현대 정치사에 있어 작지 않은 족적을 남긴 동기들이 그 무렵에는 모두 당시의 정치 상황에 관심이 많았다. 요컨대 정치학과와 외교학과는 전방위적으로 한국의 민주화와 산업화, 근대화를 이끈 인력의 산실이 되기 위한 훈련을 강의실 밖에서 더 많이 했던 것이다. 국회의원, 외교관, 교수 등으로 저마다 진로가 달랐지만 공동의 관심사가 더 컸다.

    그 무렵 최병민 회장이 통학하고 있던 집이 명륜동에 있었기 때문에 학교와 지척인 거리였다. 외교학과 71학번 동기가 20명에 불과해서 모두 친하게 지냈는데, 강의가 없는 대부분의 날이면 명륜동 집은 갈 곳 없는 학생들의 아지트가 됐다. 점심 무렵이면 한데 모여 어울렸다. 집안 형편이 넉넉했던 최병민 회장과 처지가 다른 문리대생들이 많았고, 그들과 더 넓은 세상을 이야기하며 대학 시절을 보내는 동안 더 새로운 미래를 설계할 수 있었다.

  • 외교관을 꿈꾸던 20대

    외교학과 은사 중에는 사회적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들이 많았다. 국제정치학의 석학인 이용희(李用熙), 이홍구(李洪九), 노재봉(盧在鳳) 교수 등이 그들이었다. 그분들에게 강의를 듣는 것만으로도 크게 고무되어 외교관이 되겠다는 미래의 꿈이 마치 눈앞에 닥친 일처럼 느껴지고는 했다. 그런데 외교학과는 다른 학과와는 좀 다른 분위기가 하나 있었다. 가령 정치학과는 신입생이 들어오면 막걸리로 환영식을 가졌지만 외교학과는 장차 외교관으로서의 의전이나 격식을 예행 연습한다는 뜻인지 칵테일 파티로 행사를 치르고는 했다. 그런 자리에서 칵테일을 처음 마시는 촌놈들이라며 서로를 놀리는 재미가 있었다.

    최병민 회장은 지금도 모임의 중심이 되어서 1년에 한두 차례 동기들과 만남을 주선하고 있다. 이제는 거의 모두 은퇴한 연배이지만 공직에 입적한 친구들이 많았다. 경제관료로서 또는 내무관료나 외무관료로 한국을 절대빈곤에서 탈출시키고 나아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대우받도록 헌신하기 위해 외교관의 길에 뛰어들기도 했다.

    외교학과생들은 누구나 한번은 반드시 자신의 미래 모습으로 외교관을 꿈꾸었다.
    남과 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빈곤국에 머물러 국제사회에서 온전한 세계시민으로 대접받지 못하던 한국의 젊은 대학생들에게 외교와 외교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게 인식됐을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광복 전에는 일제의 경성제국대학이었던 문리대 건물들은 낙산을 배경으로 서쪽을 향해 자리잡고 있었다. 1975년 서울대학교 본부와 문리대, 법대가 관악캠퍼스로 옮겨간 후 조성된 지금의 마로니에공원 자리가 옛 문리대 터였다. 최병민 회장이 졸업과 함께 정들었던 교정을 떠난 것도 바로 그 해의 일이었다.

    서울대학교 졸업식(1975.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