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민 회장의 일과 뜻

과거를 읽고 미래를 말하다

  • 더 넓은 세상, 더 많은 사람

    1975년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한 최병민 회장은 군 복무를 마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경영대학원에 입학한 최병민 회장은 더 넓은 세상에 눈 뜨고, 더 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었다. 한발 앞서 배운 통계학은 현대 기업을 경영하는 의사 결정자에게 최적의 정보를 제공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일본 다이오(大王)제지의 2세 경영자가 된 유학생과 만나 우정을 쌓은 소중한 인연은 우리나라보다 앞서가던 일본의 제지 기술에 다가가는 더 많은 기회를 열어주었다.

  • 군 복무를 마치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다

    1975년 종로구 동숭동에 있던 서울대학교 문리대가 관악구 신림동으로 캠퍼스를 옮겼다. 그 해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한 최병민 회장은 곧바로 군에 입대했다.

    사병으로 군 생활을 시작한 부대는 육군 수도군단이었다. 수도권 서남부 방위 군단으로, 영등포(현 문래공원)에 주둔해 있었다. 그 전신이었던 제6관구사령부가 1974년 경인지역 방어사령부로 개편되면서 창설되어 전시에는 수도방위사령부와 함께 서울특별시를 포함한 수도권 방어에 나서야 하는 부대였다.

    최병민 회장에게는 한강에 간첩이 출몰해 작전에 출동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데, 야간훈련에 출동했다가 사격훈련 중 완쪽 눈을 다쳐 수술을 받은 탓에 지금도 한쪽 눈의 시력이 좋지 않다. 이 때문에 1976년 말에 의병전역(依病轉役)으로 병역을 마친 최병민 회장은 미국 유학을 준비하며 GMAT(Graduate Management Admissions Test, 경영대학원 입학시험)를 치렀다.

    GMAT는 미국, 캐나다, 유럽 등의 대학 경영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한 대학원 시험으로, 미국 4년제 대학생들 가운데 경영대학원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시험이어서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영어시험과는 수준이 달랐다. 외무고시를 준비하던 대학 시절보다 더 혹독하게 시험공부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시험을 통과한 최병민 회장이었지만 막상 미국의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강의실에서는 여전히 영어가 부족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어려웠던 것이 있었다. 컴퓨터였다. 업무용 컴퓨터는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정부 등 공공기관에서 간혹 사용되고 는 있었으나 극히 한정적이었다. 일반인들이 컴퓨터를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것은 1980년대 이후에나 가능했을 정도였다. 미국 같은 나라들의 중산층 가정에서도 절약해야 겨우 살 수 있었으니 최병민 회장 역시 그때까지 컴퓨터를 다루어 본 적이 없었다.

    미국 유학시절의 최병민 회장과 최화식 창업주

  •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SC)에서 만난 컴퓨터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최상위권 명문 사립대학교로 한국에서 남가주(南加州)대학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주로 USC로 표기하고 있다. 스탠포드대학교, UC버클리, UCLA와 더불어 캘리포니아를 대표하는 대학으로 경영, 의학, 법학, 공학, 예술 등 전 분야에서 두루 강점을 가진 명문이다. LA 시내에 소재한 캠퍼스 곳곳에 살아 있는 여러 문화, 언어, 생활 풍습 등의 다양성을 자랑으로 여기고, 강한 동문의식과 창업가 정신으로도 유명하다.

    하와이를 경유해 LA에 도착한 최병민 회장은 우선 물자의 풍요로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백화점이든 마트든 가는 곳마다 일상에 필요한 물품들이 넘쳐났다. 어찌나 흔하고, 많든지 현기증이 난다는 말이 조금도 지나치지 않았다. 그런데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경영대학원에 입학해 MBA 과정을 밟기 시작하자 더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컴퓨터였다.

    MBA의 학업 목적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유능한 전문경영인과 창업가의 양성이다.
    실무 과정을 담당하는 인력을 양성하는 강의는 국제정치학을 전공하면서 장차 외교관으로서의 꿈을 키웠던 최병민 회장으로서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 중에서도 대단히 당황스러운 것은 컴퓨터를 처음 접하게 됐다는 점이었다. 대학 시절 배우기는커녕 만져본 적도 없는 컴퓨터였기 때문에 이를 익히기 위해서는 대단히 힘든 과정을 거쳐야 했다.

    따지고 보면 컴퓨터만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MBA 과정을 공부하려면 반드시 컴퓨터 기본 지식이 있어야 했는데, 경영학은 수치를 다루는 학문이어서 그 기본이 되는것이 통계학이었고, 이는 컴퓨터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최병민 회장은 컴퓨터 분야의 전산통계 분야와 함께 경제 또는 경영학 분야의 계량분야를 중심으로 한 응용통계를 중점적으로 교육받았다.

    그 중에서도 최병민 회장이 특별히 흥미를 느낀 분야는 재무회계였다. 영어 실력이 다소 부족한 외국인 학생들이 공부하기에 부담이 적은 과목이기도 했지만 회계를 응용하고, 컴퓨터를 이용해 전산을 도입하면 다른 분야보다 수월하게 학습 진도를 맞춰 나갈 수 있었다. 요즘의 클라우드 시스템과 유사한 개념의 데이터 베이스로 분석해서 앞으로의 경영을 예측할 수 있었고, 배운대로 적용하면 과연 분명한 결과가 산출됐다.

  • 컴퓨터와 통계학에 눈뜨다

    경영학에서 통계학은 기본이면서 필수적인 학문이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최병민 회장은 국내에서 이 또한 공부한 적이 없었다. 대학 4년 동안 외교학을 전공한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 국내에서는 통계학은 물론 컴퓨터 자체가 생소하기 이를 데없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 현대통계학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도 1960년대 서울의 몇몇 사립대학교에 통계학과가 설치되면서부터였다. 그나마 초기 통계학과를 세운 학자들은 대부분 계량적인 분석 등의 응용통계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당시 통계교육은 계량경제 등을 중심으로 하는 응용통계 분야였다. 통계학의 도입에 기여한 학자들 역시 경제학・사회학 등에 통계기법을 이용하던 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통계학을 접하게 되자 현대 기업을 경영하는 의사 결정자에게 최적의 정보를 제공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필요한 정보를 얻으려면 방대한 자료를 해독 가능한 형태로 효율적으로 처리하거나 집약해야 하는데, 통계를 통해 주어진 자료를 수집・정리・요약하고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귀국하고 보니 한국은 이제 막 전산 작업을 도입하던 무렵이었고, 대한팔프에도 당연히 과거 데이터가 남아 있을리 없었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었다. 데이터를 분석해서 앞을 내다보는 경영을 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한발 앞서 배운 최병민 회장은 오히려 때를 기다려야 했다.

  • 일본 제지시장의 벽을 넘어서다

    미국 유학 시절 최병민 회장이 맺은 일본 다이오제지와의 인연은 값으로 매기기 어려운 소중한 것이었다. 일본 다이오(大王)제지의 2세 경영자가 된 유학생과 만나 우정을 쌓게 된 일이었다. 일본 게이오대학교를 졸업하고 MBA 과정을 밟고 있는 그는 본받을 점이 많은 친구였다. 강직한 점도 좋았고 다정다감한 점도 좋았다. 최화식 창업주를 통해 일본인을 만난 경험이 많은 최병민 회장이었지만 그후로는 오히려 그 친구를 통해 더 많은 일본인과 교류할 수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우리나라보다 앞서가던 일본의 제지 기술도 격의없이 부탁해서 배울 수 있었다.

    1994년, 백판지 시장이 국내 생산량이 수요량을 초과하는 공급과잉시장을 형성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백판지의 해외시장 공략이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판단하에, 국내 제지업계 최초로 일본 시장에 진출할 때도 그에게 여러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국내 제지업계는 일본, 유럽 등 선진국에 기술을 의존해왔기 때문에 세계 최고의 제지 기술과 품질 수준을 갖춘 일본 시장에 진출한다는 것은 그 의의가 매우 각별한 일로 평가받았다.

    대한펄프는 1993년 7월부터 1994년 2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일본 인쇄업계 1, 2위 기업인 토판인쇄주식회사(Toppan Printing Co,. Ltd.), 다이닛폰인쇄주식회사(Dai Nippon Printing Co,.Ltd.) 등의 품질시험을 통과, 1994년 2월에 50톤을 첫 수출한 데 이어 매월 200톤 이상의 판지를 일본에 수출하게 됐다.

    이들 회사의 품질시험을 통과하는데 일본의 유명 제지업체들도 2년여의 기간이 걸렸으나 대한펄프는 철저한 시장 조사를 바탕으로 단 9개월 만에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대한펄프는 일본에서 품질시험이 계속되는 동안 노출되는 문제점을 효과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공장장을 비롯한 중역진들이 수차례에 걸쳐 일본으로 건너가 진두지휘하고 일본 일간지에 대한펄프 제품을 광고하는 등 세심하고 적극적인 전략을 펼쳤다.

  • 일본 다이오제지와 쌓은 인연

    다이오제지는 일본의 제지업계와 생활위생용품업계를 대표하는 기업 가운데 하나로 유아용 기저귀와 티슈 화장지에서 일본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카와 이세키치(井川伊勢吉, 1909~1990) 전 회장이 1943년 에히메(愛媛)현에서 설립한 회사다.

    다이오제지는 지난 2011년 한국의 기저귀 국내 매출액이 1,000억 원을 넘어서며 뚜렷한 성장세를 보이자 한국 시장에 직접 진출하기로 결정한다. 미국 오리건, 하와이, 중국 상하이, 칠레에 이어 다섯 번째 해외 사업소를 열기로 한 것이다. 그때까지는 우리나라에 ‘군(GOO.N) 기저귀’ 수입 총판만 두고 있었다.

    2011년 3월 일본 도후쿠(東北) 태평양 연안에서 일본 국내 관측 사상 최고 규모를 기록한 지진이 발생한 이후 다이오제지는 방사능 유출에 대한 우려로 글로벌 매출이 50% 급감하자 생산공장을 해외로 아예 이전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온라인 시장 점유율은 10% 미만으로 급격히 추락했다.

    그러나 2020년 코로나 사태 이후 다이오제지는 각종 제지제품 포트폴리오를 잘 갖춘 기업으로서 저력을 발휘했다. 화장지 품귀 현상이 빚어지면서 위생용지 사업부문에서 최고 매출 실적을 기록하고, 순이익도 약 4배 성장했다. 유럽의 인쇄용지 업계가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동안 이뤄낸 성과여서 더욱 돋보였다. 인쇄용지를 포함한 종이 산업 전체의 수요 변화가 예상되는 시점에서, 선제적으로 사업내용을 조정했기에 경쟁력을 재평가받게 된 것이다.

    최병민 회장이 미국 유학 시절 친하게 지내던 일본 친구가 있었다. 당시 최병민 회장은 외국인 학생들 모임에서 이카와 히데타카라는 일본인 유학생을 만나 각별한 우정을 나눴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외국인 학생들이 본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수강하는 영어 클래스에서 함께 공부하는 동안 그가 다이오제지를 설립한 이카와 이세키치 회장의 5남인 사실을 알게 됐다. 특히 컴퓨터 사이언스를 배운 적이 없던 최병민회장은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두 사람의 인연은 유학을 마친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성격이 서로 잘 맞았던 두 사람은 그 만남을 계기로 더욱 친해지면서 오랜 우정을 지속했다. 현재는 은퇴했으나 이카와 히데타카 사장은 도쿄 펄프 & 페이퍼 인터내셔널 주식회사(TPPI, Tokyo Pulp & Paper International)의 대표이사로 재직하면서 깨끗한나라가 제조한 백판지의 일본 수입대리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또한 각각 귀국한 후에도 사업에서 서로에게 귀감이 되는 협력 관계를 유지했고, 그러는 동안 파트너를 뛰어넘는 인연을 쌓을 수 있었다. 대한팔프 직원이 다이오제지에서 훈련을 받기도 했고, 다이오제지 직원들이 대한팔프에 와서 함께 교육을 받기도 했다.

    특히 IMF 외환위기를 겪기 전에 미리 주문했던 제지 3호기 설비를 들여오자 그게 일본 제지업계에 커다란 화제가 되면서 기자가 방한해 공장 사진을 찍고는 했다. 대한펄프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큰 기계를 들여왔다는 보도였다. 일본인들이 더욱 놀란 것은 그처럼 큰 기계에서 최고의 품질이 생산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최병민 회장과 이카와 히데타카와의 친분을 계기로 1994년부터 현재까지 26년 동안 거래를 계속하고 있는 깨끗한나라는 특히 ‘BEST COAT’라는 브랜드로 일본 고객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최화식 창업주 시대에는 일본에서 수입하던 제지를 이제 일본 현지에 수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청주공장 제지 3호기 준공식에 참석한 다이오제지 이카와 사장과 최병민 회장(1999. 6)